가해자가 된 피해자, 괴롭힘으로써 의존한다
백 어제 동료 의사들과 술자리가 있어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도 이야기가 나왔는데, 정신의학에서는 반복강박이라는 게 있어요. 성장기에 외상을 입은 사람이 불특정 대상을 향해 반복적으로 적개심을 표출하는 것이 그것인데요. 가령 폭압적인 남자한테서 고생을 하고 지낸 여자가 거기서 벗어나서 만난 다음 남자도 또 그런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시 그 사람을 재현해서 계속해서 그걸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는, 즉 마스터링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가학피학적 성향이 많은 것을 보면, 김기덕 감독도 그런 어떤 것을 해소하려고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작품을 통해 계속 그런 것을 연출하고 있거든요. 재밌는 측면은 그에게는 폭력성의 정반대 측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싶은, 순수하게 외상을 해결받고 싶어하는 그런 욕구 말입니다. 마지막 찬송가 흐르는 장면은 그것을 전적으로 드러냅니다.
정 그 점을 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한기가 부하 하나를 두들겨패는데, 그때 비로소 한기가 말 한마디를 하죠. 그건 인간의 말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비명 같은 것인데요. 이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실제’가 튀어나온 것이라고. 끝끝내 비사회화된 삶을 살고는 있지만 그래도 살고 싶다는 것, 그것을 사유화되지 못한 밑바닥 인생의 절규로 내뿜는 거죠. 다시 말해보지요. 그 짐승 같은 말이 튀어나오는 대목은, 제가 파악한대로라면 한기의 환상 속입니다. 들병이 서방 한기가 꿈속에서마저 ‘현실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을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바닷가에 앉아 있는 한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 절규 자체가 거대한 이데올로기라는 말입니다. 정신분석에 대해 잘 아시겠지만, 프로이트 정신분석에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환자가 끝까지 실제라고 하는데, 그래도 이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다는 것. 리얼리티, 원초적 외상, 이런 것 자체가 환자의 머리에서 만들어진 걸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것 자체가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는 거고요. 한기의 돼지 같은 비명 자체가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조폭영화들도 많이 있었지만, 지금 유행하는 밑바닥 문화에 대해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런 영화들이 현실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문화사회적 현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환상이고 리얼리티고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백 외상 이야기를 했는데, 외상있는 사람은 증오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증오에 휩싸이면 가해자가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선화를 피해자로 보는 시선이 많지만 실지로는 외견상 가해자인 한기가 피해자입니다. 근데 왜 김기덕 감독은 자기의 페르소나를 가해자로 만드는 걸까요. 그건 외상을 입은 자가 가해자로 서야만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와 상담을 하다보면, 의사에게 적개심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기에게 했던 방식으로 해야 그들의 외상이 치유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김기덕 감독의 페르소나는 하필 왜 여자만 골라서 괴롭히는 걸까요. 그건 구원에 대한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구원해줄 사람은 여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죠.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설정은 어쨌든 있어야 하는 것이고, 여자에 의해 구원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에 상대를 여자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통해 제가 보는 김기덕 감독은 여자를 괴롭히는 마초가 아니라, 여자에 대한 의존성이 높은 캐릭터입니다.
정 백 선생님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보셔서 여자에 집착하는 걸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저도 그런 말씀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백 괴롭힌다는 것 자체가 적극적 의존이죠. 자기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는 지배는 지배가 아니라 적극적 의존입니다.
정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볼 때, 이 영화가 한국인의 근본적인 무의식을 갖다놓고 패러디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여성평론가들의 극렬한 반대도 이해가 되지요. 한국사회는 굉장히 오랫동안 여성을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음으로써 성공과 발전의 가능성을 키워온 면이 있습니다. 어머니들이 감내해야 했던 인고, 그 인고가 신화가 되었죠. 박노해가 ‘어머니, 당신은 내가 부정해야 할 대상입니다’라고 했던 것도 그런 맥락인데요. 한국사회가 어머니를 이상화하는 방식은 어머니를 비참하게 만듦으로써였습니다. 이것은 김 감독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일반적인 문화의식이었습니다.
백 가해자와 피해자를 설정하여 남자가 스스로의 외상을 해소하는 구도를 여자 입장에서 보면 황당할 수도 있어요. 그 역할을 하기 싫다, 라고 거부하는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선화가 제3의 표정을 지었다면?
정 이 영화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호하게 하지 않았을 때, 그 둘의 소통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단일한 내러티브로 읽는 경우, 한여름밤의 꿈이 되고 말죠. 카타르시스의 장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고 한바탕 카타르시스를 겪고 나면 그걸로 인해 현실에서는 그만큼 범죄를 저지를 위험이 줄어든다는 고전적 이론이 있지요. 역으로, 저는 극장 안에서 카타르시스를 겪었으므로 현실에서는 더 자유로울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나쁜 남자>가 만약 현실과 환상이 확연히 구분되었다면 혹은 어느 한가지로 단일화됐다면 신나게 한번 보고 나오는 영화에 지나지 않았겠죠. 그런데 이 영화는 분리돼 있으면서도 모호합니다. 다만 현실과 환상이 별개의 영역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있습니다. 모래에서 사진을 뽑았더니 한기와 선화의 사진인 것, 그것 자체가 한기의 내러티브가 꿈이라는 증거입니다.
백 거기서 끝났다면 그렇게 볼 수 있지만, 바닷가에서 몸파는 신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정 아니죠. 그게 바로 한기가 생활하고 있는 실제 현실인 거죠. 한기 생각에, 그렇게 마누라 데리고 다니는 게 너무 한심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사창가에서 한몫하는 깡패고 선화는 대학생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자기 마누라가 된 거다, 이렇게 공상을 하는 겁니다. 다만, 영화의 뒷부분에서 실제 한기의 생활이 앞부분 한기의 환상을 일정 정도 ‘시늉’내고 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선화가 일을 치르고 나서 한기 옆에 앉을 때 로맨틱한 표정을 짓잖아요. 그건, 환상 속 한기의 상황이 선화에게 전이된 것이고, 저는 그게 이 영화의 패착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아무렇게나 몸 팔고 돈 세고 이런 여자의 표정을 지어서도 안 되겠죠. 뭔가 제3의 표정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제가 창작자가 아니라서 그 표정이 뭔지는 모르겠고(웃음), 다만 그 표정을 못 만들었기 때문에 관객으로 하여금 <나쁜 남자>를 하나로 이어진 단일한 내러티브로 읽게끔 유도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겁니다. 이 영화가 한편으로는 ‘신나게 한번 나쁜 남자처럼 살아보고 싶다’ 하는 남자의 욕망을 대변하면서 한편으로는 여자들의 격렬한 혐오를 불러일으킨, 원인도 그것이지 않을까요. 마지막 그 선화의 표정만 조금 다르게 처리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 자신을 강간한 남자에게 여자가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 포르노그라피적인 내러티브죠. 그걸 그대로 차용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여성관객이 보고 기분 나빴을 것입니다. 내가 여자라도 화가 났을 테니까요. 여권신장이 많이 됐다고는 하지만 아직 여자들이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 반응이 거센 것 같아요. 여성들이 현실에서 아무런 불행감을 느끼지 않는 사회에 있다면 ‘어 귀여운데’ 뭐 이럴 수도 있었겠죠. 영화 속에서 남성의 외상을 이런 식으로 해소하는 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가부장 사회, 즉 남성들이 주생산을 담당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피해자로 상징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극단화된 경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요. <나쁜 남자>가 불러일으킨 이런 격렬한 반응 자체가 저는 사회의 남녀불평등 구조를 해소시키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칠까 궁금한데요.
백 지식인들도 영화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을 여유가 없고 바로 현실로 보는 것에서 저는 놀라움을 느낍니다.
정 그런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여성평론가들이 전혀 화낼 일이 아니라고 보는 게, 오히려 여성평론가들을 도와주고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거든요. <나쁜 남자>는 여성의 이상화까지 포함하여, 남녀를 구분하는 이데올로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자
씨네21 <나쁜 남자>를 독립적인 텍스트로 놓고 벤치에서 벤치까지를 꿈으로 읽으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영화가 갖고 있는 즉자적인 영향력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자들 평을 보면 이런 말도 있어요. 더이상 윤리적인 측면말고 미학적인 측면을 이야기하자. 여기에, 미학을 윤리와 구분할 수 있는가, 라는 비판론자의 평이 따라붙습니다. 예술의 윤리성은 대단히 오래되고 복잡한 문제긴 합니다만, <나쁜 남자>의 경우엔 유달리 이런 유의 문제제기가 많습니다.
정 사회적 효과에서 저는 <나쁜 남자>라는 한 영화가 절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성공한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 영화가 두개의 극단적인 얘기를 유발했다는 것 자체로 의미있습니다. 한쪽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한쪽은 격렬한 비판적 반응을 보이고, 여기서 좀더 가야 하는데, 지금 좀더 못 가고 있지요. 두 진영이 어떤 식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그와 관련해서 아까 이야기했던 마지막 장면에서의 ‘선화의 표정’이 실패한 지점은 분명히 짚어져야겠지요.
백 화가로 치면 김기덕 감독은 인상파 화가 같아요. 영화는 실사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와닿아서 그렇지만. 그의 영화는 인상파 화폭 같은 이미지 속에서 다분히 종교적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죄가 있고 구원이 있는 종교적인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윤리적입니다. 사회적인 윤리에 찬동하거나 안티를 거는 게 아니라, 그 스스로 진정으로 윤리적인 작품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정 한 가지 덧붙일까요? <나쁜 남자>는 앞부분과 뒷부분의 앵글이 완전히 다른 것도 눈에 띕니다.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창가 부분에선 클로즈업이 매우 빈번히 사용되어서 갑갑한 느낌이 들게 하는 반면, 바닷가 장면에서는 넓게 펼쳐진 장면을 잡아내죠. 그렇게 처음부터 클로즈업으로만 일관돼 있는 영화도 흔치 않을 거예요. 굉장히 갑갑하고 답답해서, 정성일씨 말대로 그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고 싶지 않은 느낌이 들지요. 그렇게 좁게 가둬놓고 찍는 게 어떤 영화적인 효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다시피 클로즈업은 상상적 자아를 극대화하는 방식입니다. 반면 롱 숏은 객관적 현실을 응시하게 하지요. 제가 말씀드린 환상과 현실의 이중구조는 이런 촬영방식과도 연관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이 왜 구체적으로 지적되지 않는지, 문외한인 저로선 다소 의아합니다. 텍스트에 좀더 충실해진다면, 좀더 풍부한 논쟁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마추어 관객으로선, 더이상 얘기하는 건 결례일 것 같네요.
백 동의합니다.
씨네21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정리 최수임 [email protected]·사진 정진환 [email protected]
참석자
정과리 문학평론가·연세대 교수(국문학)
백상빈 정신과 의사(세브란스 병원)▶ 국문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나쁜 남자>를 논하다 (1)
▶ 국문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나쁜 남자>를 논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