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이, 더 넓게 보기 위해, 영화를 접고 책을 펴야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의 본질을 사유하는 장, 거장의 비밀을 엿보는 장, 주요 영화나라의 원동력을 꿰뚫는 장, 이 장들의 경계를 들며나며 우리는 스크린 더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오즈의 초상화, 감춰졌던 조각들 <감독 오즈 야스지로>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윤용순 옮김/ 한나래 펴냄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오즈, 그러니까 우리로부터 박탈당했던 오즈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하스미 시게히코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조롭고 결여되어 있는 건 오즈의 영화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우리의 눈동자 자체라고 말한다. 그가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오즈의 영화는 빈약한 영화, 부자유스런 영화, 부정에 의해 정의될 영화가 절대 아니라 풍부한 영화, 자유로운 영화, 영화의 한계까지 다가간 영화이다. 이런 논의가 가끔은 정당한 의구심을 자아내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스미의 도발적이고 신선한 글을 읽는다는 것은 좋은 평문을 읽는다는 것의 감동을 가르쳐준다. 지난해 국내에 발간된 영화 도서 중 단연 최고라고 해도 좋을 이 책은(저자가 서장에서 지적했듯이) 오즈의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망 혹은 그러지 못한다는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기꺼이 앞장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다는 욕망도 생기게 만든다.
옛 영화대국의 발자취를 찾아 <이탈리아 영화사> 로랑스 스키파노 지음/ 이주현 옮김/ 동문선 펴냄
D. W. 그리피스에게 장대한 에픽영화를 만들도록 경쟁심을 불어넣은 것은 이탈리아의 초창기 에픽영화였고, 누벨바그 일원들이 특히 흠모한 시네아스트들 가운데 하나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였다. 요즘은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탈리아는 영화사 초창기부터 어떤 쪽으로든 영화강국의 위용을 과시하던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이탈리아 영화사>는 그 이탈리아영화의 자취를 보여주는 책이다. 국내에 거의 최초로 소개되는 이탈리아 영화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긴 하지만 사실 이것이 ‘풍성한 책’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여기에 소개된 1945년에서 1995년에 이르는 이탈리아 영화사는 겨우 가닥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이며, 더구나 생소한 이름들에 대한 역주도 빈약한 편이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이탈리아 영화사에 조금이나마 흥미를 갖게 된 이들에게는 영화로 쓰인 책들, 특히 최근에 나온 마르시아 랜디의 <이탈리아 영화>(Italian Film, 캠브리지대학 출판부)를 권한다.
개략도 지나, 깊고 넓게 <일본영화 다시 보기-작가주의, 장르, 역사> 아서 놀레티·데이비드 데서 엮음/ 편장완·정수완 옮김/ 시공사 펴냄
최근 들어 일본영화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일본영화가 꽤 친숙해진 듯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영화 자체는 제쳐두고 일본영화를 소개한 도서들만을 보더라도 충분히 그런 인상을 준다. 국내에 나와 있는 일본영화 관련 도서라고 해봐야 다소 빈약해 보이는 일본영화 통사들만이 눈에 띄니까 말이다. <일본영화 다시 보기…>는 그런 열악한 사정에서 돋보인다고 할 만한 일본영화 연구서 가운데 하나다. 작가주의, 장르, 역사, 이 세 파트 아래 실린 글들은 일본영화 속으로 제대로 한 걸음 내디디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 책엔 흥미로운 글들이 여럿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고마쓰 히로시의 ‘제1차 세계대전 전 일본영화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들’부터 보라고 권하겠다. 여기엔 초창기의 일본영화가 어떻게 서구와 일본의 재현양식을 충돌시키면서 그 형성과정을 겪었는지가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시 문제는 현실이다 <비가시 영역: 영화적 리얼리즘에 관하여> 파스칼 보니체 지음/ 김건·홍영주 옮김/ 도서출판 정주 펴냄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평론가인 파스칼 보니체의 글을 모은 <비가시 영역…>은 주로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도대체 ‘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책이다. 보니체는 우리가 너무도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영화의 최소단위로서 숏(‘쁠랑plan’)이라는 것에 대해 사고하면서 시작한다. 영화사에 일어난 변화란 이 숏이라는 것의 속성의 변화라고 보는 그는 영화란 바로 그것에서 시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것 자체에 대한 사유에의 동참을 요구하는 이 책은 당연히 사고의 수고로움을 유발하며 그런 만큼 피로한 사고하기의 즐거움을 알려준다. 한데 다소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읽기의 수고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편으로 역자들이 공들여 붙여놓았을 법한 긴 역주들도 노력에 비해 효과는 크지 못한 것 같아 또다른 아쉬움을 남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영화 서술학> 앙드레 고드로·프랑수아 조스트 지음/ 송지연 옮김/ 동문선 펴냄
서사학이란 분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국내에 서사학 관련 도서는 꽤 출간되어 있는 편이다. 그런데 그것들 대부분은 문학에 중점을 두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영상 서사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문자 서사와 비교 아래 그것을 다루고 있는 쪽이다. 반면 <영화 서술학>은 그 무게중심이 전적으로 ‘영화(의) 서사학(서술학)’을 향해 있는 책이다. 이 책의 두 저자는 서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일반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서 공간, 시간, 시점에 이르는 영화 서사학의 주요 논점들을 설명하고 있다. 영화 서사학의 근본 개념들과 문제들을 종합하려는 목표를 가진 책이어서인지 서사학에서 쓰이는 개념들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론서치고는 비교적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명화, 그 시시콜콜한 뒤안 <클라시커 50 영화> 니콜라우스 슈뢰더 지음/ 남완석 옮김/ 해냄 펴냄
세계 영화사에서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을 이 책 <…영화>에서 찾아보자. 그러면 오슨 웰스가 어떻게 해서 영화계에 진입하게 되었고 또 이 영화로 어떤 곤경을 겪었으며 어떻게 영화의 혁신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선명한 사진들 주위로는 언론기사라든가 웰스가 한 말 등이 실린 박스기사가 있다. 그리고 뒤에는 감독에 대한 짧은 소개가 있고 “<시민 케인>은 영화사의 한 전환점”이라는 요약적 평가가 보인다. 대충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건 5∼9페이지 안에 한편의 영화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충분히 요약되어 있는 체제이다. 게다가 흥미롭기까지 한 이야깃거리가 말이다. 물론 여기서 한 영화에 대한 너무 심각한 비평적 시선은 바라지 않는 게 좋다. 또한 이 책에 실린 잡다한 종류의 영화 50편을 필수 감상 영화 50편으로 오해하지도 말아야 한다.
<완령옥>말고 ‘완령옥’에 방점 <현대 중국, 영화로 가다> 후지이 쇼조 지음/ 김양수 옮김/ 지호 펴냄
서장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현대 중국, 영화로 가다>는 “영화책이라기보다는 중국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교양서”에 가까운 책이라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건 중국 영화사, 혹은 중국영화에 대한 비평서로 보면 다소 실망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영화를 매개로 해서 현대의 중국이 어떻게 변천해왔는가를 살펴보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1930년대 중국의 전설적인 여배우 완령옥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반환을 앞둔 홍콩으로 끝을 맺는데, 그 시간의 추이를 중국에 대한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관심으로 잘 메워놓는다. 지나치게 딱딱하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사 책인 슈테판 크라머의 <중국영화사>(이산 펴냄)와 상호보완적으로 읽으면 책으로 보는 꽤 효과적인 중국 영화사 여행을 떠나볼 수 있을 듯싶다.
영화 속 여성, 여성 속 영화 <여성 영화인 사전> 주진숙·변재란·장미희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여성 영화인 사전>이라는 제목을 접하게 되면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것일 게다. 혹 배우들로만 책 한권을 메운 건 아닐까? 물론 여기엔 배우들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할 테지만 영화계에서 다른 일을 한 사람들, 이를테면 영화감독을 비롯해 애니메이터, 제작자, 촬영기사, 의상담당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 영화인들을 만날 수 있다. <여성 영화인 사전>은 자칫하다가는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릴 수 있었을 이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꼼꼼한 ‘기록’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가질 법한 또 하나의 선입견은 이런 것이다. 사전이라면 인명과 그에 대한 설명으로 빼곡이 들어찬 갑갑한 책이 아닐까? <여성 영화인 사전>은 한국 영화사의 한 시기에 대한 개괄을 비롯해 여러 기록들을 다채롭게 배치함으로써 이런 지레짐작을 효과적으로 비껴간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고고성 <헐리웃 문화혁명> 피터 비스킨드 지음/ 박성학 옮김/ 시각과 언어 펴냄
<포인트 블랭크>(1967)를 찍던 무렵 존 부어맨은 당시 미국의 스튜디오들은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있었고 무얼 해야 하는지 확신이 없었던 때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쯤이었다. 새로운 할리우드가 태동의 용틀임을 하던 게. <헐리웃 문화혁명>은 당시의 새로운 세대들이 할리우드에 ‘문화혁명’을 일으키던 1960년대 말로부터 그 화려한 혁명도 결국에는 쇠퇴를 보고 만 1970년대 말까지의 미국 영화사를 기록한 책이다. 한글 책으로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마틴 스코시즈, 스티븐 스필버그, 프랜시스 코폴라, 폴린 케일 등 수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인터뷰와 취재로 메운 저자 피터 비스킨드는 건실한 저널리스트의 한 면모를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베리만, 절망만큼의 감동 <마법의 등> 잉마르 베리만 지음/ 민승남 옮김/ 이론과 실천 펴냄
잉마르 베리만의 자서전인 <마법의 등>을 읽으면 상대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까다로운 한 사람이 눈에 보인다. 이 책에 자기 자신이 그려낸 베리만은 지나치게 자기만의 우주에 갇혀 있는 것 같고 홀로 고통을 다 짊어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고 또 예술가들을 다룬 그 흔한 영화들에나 나올 것 같은 괴팍하고 과도하게 완벽주의적인 사람이다. 그 베리만이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과거의 삽화들과 내면에서 길어올리는 독백들은 역시 대면하기 쉬운 게 아니다. 극도의 고통과 절망, 죽음의 풍경들과 함께 이야기되는 그것들은 읽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면 때론 이유를 알지 못할 감동이 전해지기도 한다. 마치 절망적으로 감동적인 베리만의 어떤 영화들을 체험할 때처럼. <마법의 등>은 베리만뿐 아니라 그의 영화들과도 제대로 공명하는 그런 책이라고 할 만하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세계의 영화지와 평론가들이 뽑은 최고 · 최악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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