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말, 동물 최초로 에로리그에 출전하다
국내 에로리그는 정규시즌에 돌입하자마자 시비에 휩싸였다. 도화선은 <애마부인>. 일부 관계자들은 “지금까지 금기시해온 동물까지 끌어다 타석에 내보내는 건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난다”며 미등록 선수의 출전이 불법이라며 강하게 문제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KEO(Korea Erotic film Organization)는 ‘미국에도 선례가 있고, 또 지극한 동물애호로 보여지므로 별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으로 갈무리.
이어진 하반기 리그는 ‘이변’으로 시작됐다. 타선의 응집력이 약한 것으로 평가됐던 <반노>는 원미경, 마흥식 등 오랜 ‘중고 신인’ 콤비의 활약으로, <애마부인>의 거포 안소영, 임동진 두 선수가 이적해 기대를 모았던 <산딸기>를 눌렀던 것이다. 승부는 일체의 보호 장구 없이 들어섰지만 원미경이 타석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좀더 적극적으로 덤볐던 것에서 이미 <반노>쪽으로 기울었다는 게 당시 대부분의 관전평이다.
이에 비해 첫선을 보인 <빨간앵두>는 기대 이하의 전력만을 노출했는데, 방희, 신영일 등이 있긴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서 한방을 날려줄 슬러거의 부재가 쓴잔을 들이켠 이유라는 게 중평이다. 내용 역시 <애마부인>과 비슷하며, 말 또한 등장하지만, 그저 그런 소품에 불과할 따름이라 별 재미를 못 본 케이스. 이에 비해 <애마부인>의 구단주인 연방영화사의 <탄야>는 야성미 넘치는 하명중을 3번에, 지적인 외모의 강석우를 5번에 기용한 뒤, 실의에 빠져 있던 안소영을 독려해서 4번 타자로 기용, 탄탄한 진용만으로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82년 총관중 수는 3917만명으로 집계됐는데, 약 200만명 정도가 줄어든 수치. 이는 전년도에 비해 92.2%나 늘어난 TV 수상기의 보급 때문이다. 특히 이탈자 중 상당수가 <명랑운동회> 등 사이비 운동 프로그램 등에 중독되면서, 휴일 오전 시간을 응원에 허비하느라 정작 경기장을 찾을 시간에 수면을 취하는 사태 등이 빈번히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97개나 됐던 3년 전에 비해 전체 팀 수가 80개로 줄었고, 관중 수까지 소폭 감소할 움직임을 보이자 5공 정부는 국내리그 활성화 방안을 담은 긴급 시책을 발표한다. 이전까지는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구단주만 팀을 만들 수 있었으나, 이제는 등록만 하면 리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 하지만 에로지구의 경우에는 주어진 혜택만큼 제한도 따랐다. 특히 구단이 자주 이용하는 버스나 홈 경기장에 지나치게 외설적인 광고물을 부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게 된 데는 ‘풍기문란 근절하여, 정의사회 구현하자’는 정부의 의지가 작용하기도 했지만, 연초부터 유지인, 금보라, 나영희, 오수비, 이보희 등 국내 리그에서 내로라 하는 여자 선수들이 KEO에 일언반구도 없이 재팬 리그에서 발행하는 모 잡지에 나란히 모델로 등장, 신체의 일부분을 노출한 사건이 발각되어 경고조치당한 것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의 경우, 아시안게임을 1년 남겨두고 벌어진 전력누수 사태인 만큼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도 했으나, 결국 고의성이 없었다고 판단해서 개별 선수들에게는 경미한 처벌이 내려졌다. 대신 가위를 든 심판진인 공륜은 에로리그에 곧장 ‘검열강화’라는 엄청난 전체기합을 가했다.
그 때문인지 <애마부인3>만이 8만6천명의 관중을 불러모아 그해 랭킹 톱10에 끼었을 뿐, <산딸기2> <반노2> <빨간앵두2> 등은 모두 자멸했다. 여기에 <먹다버린 능금>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 <깊은 숲속 옹달샘> <깊고 깊은 그곳에> <뼈와 살이 타는 밤> <밤을 먹고 사는 여인> <피조개 뭍에 오르다> 등 고만고만한 팀들의 처지는 더욱 딱했다. 선우일란, 오수비 등 대어급 신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 역시 한해 5팀을 옮겨다니며 ‘최다 이적선수’라는 영예 아닌 영예만을 얻었을 뿐이다. 다만 경기장에서 정권에 대한 비난 발언을 간헐적, 우회적으로 암시해 화제를 모았던 <어우동>만이 서울에서 관중 39만2천명을 동원했다. 이를 기화로 86년에는 <내시> <뽕> <변강쇠> 등이 전체 리그순위 10위 안에 들 정도로 사극에로 강세경향이 두드러졌다. 1988년 <매춘>의 외인구단 vs <파리애마>의 해외 전지훈련
지상 최대의 쇼, 올림픽이 코리아에서 열렸지만,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는 국내 에로리그는 다른 리그에 비해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당시에는 ‘신토불이’ 구호 아래 연이어 제작됐던 <가루지기> <뽕2> <변강쇠3> 등이 꾸준한 팬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단순한 애국주의의 발로라기보다는 짧은 스토브 리그 중에 강문영, 하유미, 최미선 등 곧바로 실전에 투입할 만한 대어급 신인선수 발굴에 각 팀들이 애를 쓴 것이 큰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
<변강쇠> 팀은 요란법석한 쇼맨십과 허풍가득한 퍼포먼스로 관중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던 이대근 선수 대신 좀더 무게있고 진중한, 그러면서 토속적인 마스크의 김진태를 타석에 기용하는 모험을 감행, 무난한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88년은 ‘찍히면 자른다’는 기조 아래 가위 들고 설치던 심판위원회 공륜의 기세가 누그러진 한해이기도 했다. 특히 대표주심이 바뀌면서 그동안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팀들이 대거 팀조직과 재정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깜동>은 어둠 속에서 이보희, 김희라 두 선수가 보여준 타격 자세가 규정에 나와 있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아, 별로 괴이하지 않은데도 전체 장면이 모자이크 처리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88년 에로리그의 양대산맥은 <매춘>과 <파리애마>. 특히 <매춘>은 FA시장에서도 팔리지 않던 나영희, 김문희 등을 불러들여 만든 일종의 외인구단. 올림픽이 열리던 기간에 서울 명동의 중앙 경기장에서 첫날 게임을 가졌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예상치 않았지만, 43만2천명을 불러모을 정도로 매일 연타석 홈런포를 작동했다. 물론 <매춘>의 경우 팀 내 여자선수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부당한 처사가 바깥으로 흘러나와 일부 여성 관중이 이례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말썽을 빚기도 했다. <애마부인>의 초대 조련사로 알려진 정인엽 감독의 <파리애마>는 해외 전지훈련에다 외국인 선수를 스카우트한 것이 관중 10만명을 돌파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마이너리그라 불리던 비디오 시장에서도 당시로서는 거액인 1500만원에 팔릴 정도였다고.
1992년 마이너로 향한 에로팀들, <젖소부인…> 성공신화 일궈
사실 에로리그의 폐업 선언은 3∼4년 전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88년 <위험한 정사>를 시작으로 할리우드의 거대 구단들이 대거 입성하게 되고, 국내 팬들의 상당수가 화려한 개인기 위주의 할리우드 직배리그 팀들에 관심을 돌리게 된 것. 한때 할리우드 직배리그 상륙 결사반대를 위한 투쟁위원회 등이 결성되어 일부 경기장에 국산 구렁이를 푸는 등 강한 반발이 있긴 했지만 그러한 저항도 오래지 않았다.
92년은 이미 대세를 거스르기엔 너무 벅찬 상황. <원초적 본능> 소속 샤론 스톤이 특유의 거만한 자태로 다리 꼬기 타법을 선보이는 상황에서 국내 에로리그는 고작해야 <탄드라 부인> <캉캉69> <데카당스 37˚2> 등 외국 팀을 본떠 이름을 짓는 고육책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중 관중 5만명 이상이 몰려든 국내 경기는 단 한편도 없었다. 여기에 <결혼이야기>를 필두로 국내 여타 리그들에서도 에로리그의 룰을 적극적으로 변용해서 끌어들인 것도 에로리그의 대내외적인 위상이나 입지를 좁혔는데, 이로써 국내 에로리그는 마이너로 분류됐던 비디오숍과 안방으로 자리를 옮겨 게임을 치르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마이너리그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다. 떨어지는 몫이 쏠쏠한 편이었던 것. 결혼 필수품으로 VTR이 각광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보급률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관중은 생생함은 극장에 비해 떨어지지만 안방에서 경기를 그것도 은밀히 즐길 수 있게 됐고, 이에 부응하는 <야시장> 등 자극적인 컬러의 팀들이 출현했으며, 경기를 맘껏 골라 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비디오숍 역시 2만여곳에 이를 정도로 호황을 맞았다.
이 당시 유호프로덕션과 한씨네마타운 산하의 팀들이 벌인 선의의 격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승부. 리그 창설에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한 유호프로덕션은 <야시장>에 이어 94년부터는 세계 각국의 대표선수들을 기용한 <성애의 여행>팀과 코믹으로 승부한 <어쭈구리> 시리즈로 기선을 잡았다. 유호보다 후발주자인 한씨네마타운은 물량공세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일단 <정사수표> 시리즈로 자리를 잡은 뒤 한지일 대표가 직접 배우로 출연하는 등 구단의 운영비를 최대한 줄이는 슬림화 전략을 기조로 운영해오다 94년, 진도희라는 희대의 걸출한 에로스타를 발굴, <젖소부인 바람났네>라는 장수팀을 이끌어 유호와 함께 양강체제를 구축했던 시기였다.
1996년 이후 우리는 언제 다시 뜨거워질까?
그러나 거품은 금세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리그는 어떠한 자각도 없이 97년과 98년, 연이어 대대적인 베끼기 경쟁에 들어간다. 팀명을 따와서 비트는 기술에 승부를 걸었는데, 충무로 메이저리그의 작품들이 1차적인 대상이 됐다. <유월의 화이트데이> <간첩 리철순> <모텔성인장>을 시작으로, 이젠 지겨울 법도 하건만 아직도 <자취방 습격사건> <번지점프 중에 하다> <털수선> 등 기막힌 제목들이 끊이지 않고 쏟아진다. 물론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얼마나 많은 선수가 어떤 자세로 기예를 보여주냐는 차이일 뿐이다.
1차 관중격인 비디오숍들은 9천개 수준으로 대거 줄어든 상태. 여기에 누구나 휘두를 수 있는 값싸고 가벼운 디지털 캠코더라는 ‘신종 배트’가 등장한 것과 맞물려 지금은 40여개 업체들이 3∼4일에 한 작품씩 내놓고 있는 이른바 난립·혼란 상황이다. 이러니 이른바 ‘공회전’과 ‘끼워팔기’와 ‘사은품 살포’등의 로비가 아니고선 아예 관중과 만나기조차 불가능한 형국이다. 비좁은 비디오 필드에서 아웅다웅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중과 만나는 대부분의 팀들 역시 90분 분량의 ‘체위 버라이어티 쇼’를 보여주는 데만 정신을 팔고 있다. 마이너의 세계에 갇혀버린 에로영화의 탈출구는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들은 언제쯤 다시 격상할 수 있을 것인가. 이영진 [email protected]▶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 <애마부인> 감독 정인엽 인터뷰
▶ 1982년 <애마부인>, 그리고 에로영화는 어떻게 달려왔는가
▶ 기억1 <애마부인>을 따라 욕망의 비빔밥을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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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