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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소설은 생(生)의 언어다
이다혜 사진 오계옥 2013-07-31

<너를 봤어> <완득이> 소설가 김려령

“영화하는 분들께 건네는 내 식의 감사인사다.” 김려령 작가는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다. 동화부터 청소년 소설까지 어린 독자들을 위한 소설을 주로 써온 김려령 작가가 성인을 위한 소설 <너를 봤어>를 펴내고 <씨네21>의 인터뷰를 받아들인 이유는 그랬다. “<완득이>라는 콘텐츠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골목골목까지 파고들게 한 흡수력을 책이 갖기 위해서는 200만부는 넘게 팔려야 했을 텐데…. 영화인들에게 일종의 빚을 졌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가 쓴 또 한권의 청소년 소설 <우아한 거짓말>도 곧 이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될 예정이다. <너를 봤어>를 계기로 전체 관람가 영화뿐 아니라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김려령표 영화를 머지않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처음 ‘성인을 위한’ 책(<너를 봤어>)을 썼다고 새삼 주목하는 분위기가 불편한 면도 있을 것 같다. 작가로서는 일관된 작업일 텐데. =청소년 작가라는 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들 많이 묻는다. 하지만 그간 쭉 동화부터 청소년 소설까지 발표해왔으니, 그런 말을 안 들으면 오히려 내가 충실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틀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틀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오면 그걸 어디에 담아야 하나 하는. <너를 봤어>의 경우는 회상 신에서 아이들이 나오긴 하지만 청소년 소설로 쓸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이야기에 맞는 틀을 선택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완득이>는 영화화되면서 영화가 책을 그대로 옮긴 부분도 있지만 뒤로 갈수록 소설보다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바뀐다. 영화가 책과 다른 점에 대해 좋은 점 혹은 아쉬운 점은 없었나. =완득이 같은 애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한번이라도 킥복싱 경기의 승을 안겨주는 식의 성과가 있으면 이 모든 것이 성과를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청소년기는 이루는 때가 아니라 실패하는 시기다. 계속 실패의 과정에 있고, 그게 그 시기의 성공이다. 그 또래에 겪는 실패가 밉지 않다는 걸 아이들의 마음속에 쏙 넣어주고 싶어서 그렇게 쓴 거다. 영화가 갖고 있는 색채는 마음에 들었다. 감독님과 내가 같은 곳을 본 건 맞다고 생각한다.

-<너를 봤어>의 주인공인 소설가 수현은 어렸을 때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고, 결국 그 자신도 폭력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 겉으로 볼 때는 큰 문제가 없을 것처럼 외형적으로 성장해가는 주인공이 있지만, 그가 느끼는 ‘폭력이 되돌아온다’는 공포, 나아가 그 자신이 가해자의 자리에 섰다는 공포가 절실하게 그려진다. =한살씩 나이를 먹다보면 삶이 직선일 것 같잖나. 사실 원이거든. 아동청소년물을 쓰다보니까 아이들을 깊게 관찰할 수밖에 없다. 아동폭력은 내상과 외상을 같이 입는데, 그로 인한 폭력의 대물림도 위험하지만, 잠재된 폭력도 상당히 위험하다. 성인이 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저 안 어딘가가 저릿저릿하다. 폭력장면을 소설로 쓴 이유는, 주인공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징글징글맞은 사람,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어 숨이 막히는 사람, 그런데도 그냥 살아야 하는 끔찍함을 소설 속에서나마 끝내주고 싶었다. 내가 죽여줄게, 그런 심리다. 이 책은 동시에, 이런 질문도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사실은 살인자라면.

-<너를 봤어>를 성인을 위한 소설이라고 못박은 이유는. =영화도 전체 관람가가 있고 청소년 관람불가도 있잖나. 한 감독이 한 등급 영화만 찍는 게 아니고. 소재에 따른 틀을 정하는 거지. 그걸 부러 앞에 써준 건, 지금껏 읽었으니까 이것도 읽을 수 있잖아 하고 너무 어린 친구들, 초등학생, 이런 친구들이 읽을까봐서다. 이건 전체 관람가가 아니야 하는 의미다. 어떤 장르나 그 소명이 있을 것이다. 동화라는 건 원초적인 힘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끝내 버려서는 안되는 힘이자 돌아가야 할 어떤 것. 그래서 동화가 맑다는 거다. 정말 악한 동화도 많지만, 그게 결국 원초적인 힘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거든. 그런데 성인이 읽는 소설로 가면 생(生)이다. 낙차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삶이 그렇잖나. 오래 살았다고 더 현명한 건 아니지만 삶의 낙차나 진폭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런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

-<너를 봤어>는 세상 참 어둡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너’를 만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통 속에서 사랑을 발견한다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사실은 그것이 가능한 것이었구나 하는 안도가 아닐까. 너를 봤어, 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내가 본 ‘너’와 네가 본 ‘나’. 내가 본 ‘너’는 사랑의 시작이지만, 네가 본 ‘나’는 공포의 시작이다. 주인공 수현은 주변 사람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너무 잘 아는 남자다. 사랑하는 여자의 삶이 자신 때문에 진창이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책 속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외의 방법을 알지 못하는 남자의 지독하고 아픈 사랑이다.

-<7년의 밤> <28>의 정유정 작가와 친분이 두텁다고 들었다. =정유정 선배와 등단한 해가 같다. 시상식을 오가다 만났는데 그냥 딱 꽂히는 사람 있잖나. 작품과 사람이 일치되는 사람이고, 형 같은 느낌이다. 형 같은 언니. 아마 나도 남동생 같은 여동생이겠지. 다음에 이런 것 쓸 거야 하는 얘기도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 무엇보다 선배와 내가 이야기의 스케일이 다르니까…. 정유정 선배가 고래라면 난 다금바리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들은 정유정 선배가 웃으면서 “야, 다금바리가 싼 생선은 아니다”라더라. (웃음)

-고래는 멸종 위기에 있지 않나! =그러니까 대단한 존재라는 거지! (웃음) 재능과 성실함을 두루 갖춘 사람이 정유정 선배다.

-힐링이 유행하는 세상에서 결코 힐링이나 위로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특이하다. <너를 봤어>뿐 아니라 <우아한 거짓말>도 그랬다. =진짜 힐링은 그가 보는 것을 같이 봐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같은 걸 최대한 같이 봐주는 것. 아픔을 최대한 같이 느끼고 숨쉬는 것. 안 아프다고 한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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