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개월’이 아닌 그냥 ‘김예림’으로 돌아온 그녀는 무심함이 매력인 스무살 소녀였다. 특히 ‘그냥’이란 표현을 애용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녀의 ‘그냥’은 그냥 쓰는 단어가 아닌, 이런저런 뉘앙스로 분하기 직전의 잠재태에 가까웠다. <슈퍼스타K> 시즌3 이후 1년 반 만에 내놓은 그녀의 첫 미니 앨범 제목도 특정한 수식어에 묶여 있지 않은 ≪A Voice≫다. 하지만 그녀가 ‘그냥’ 부른 다섯 노래는 금세 각기 다른 서사와 온도와 리듬으로 듣는 이의 귀를 낚아챈다. 그러니 한편으로 저 제목은 다섯 가지 톤을 거뜬히 휘감아낸 ‘하나’의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할 테다. 6월18일 쇼케이스 직후 만난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겨우 출발선을 통과했을 뿐임에도, 충분히 유연하고 또 단단했다.
-쇼케이스는 잘 치렀나. =이제야 앨범이 나온 게 실감이 났다. 무대에 서서 라이브로 내 노래를 부르고 나니까.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면서, 좀더 빨리 세상에 나오고 싶지는 않았나. =지금 딱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 우리의 향후 몇년을 좌우할 거라 생각하니 오래 고민하게 되더라.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더 어렸고, 나도 대윤이도 결정의 시기가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미스틱89’ 윤종신 대표가 결정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줬나. 나름 투개월이 이런 음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상을 갖고 있었다던데. =그전까진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밥을 먹으면서 “우리 같이 해보자”며 어찌 보면 진지한 이야기를 그냥 서슴없이 건네는 모습에 오히려 믿음이 갔달까. 그게 어떤 심리였다고 설명은 못하겠지만. (웃음) 사실 대화 자체는 추상적이었는데, 그 안에서 종신 쌤(선생님)과 우리의 생각이 비슷하단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도대윤군이 고등학교 졸업을 위해 미국에 다녀오는 동안 홀로 데뷔를 하게 됐다. 수록곡 모두 20대 후반에서 40대 사이 남성 작곡가들에게 받은 곡임에도 가사는 모두 절묘하게 스무살 소녀 감성이더라. =작사에 참여를 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내가 경험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됐다. 아마 <컬러링>은 조휴일님이 20대 초반일 때 썼던 곡이라 그분의 당시 감성이 지금 내 감성과 맞아떨어진 부분이 있는 것 같고, <All Right>은 종신 쌤이 평소 내 말투에 맞춰 써주신 곡이라 특히 그럴 거다. 다른 분들도 나를 떠올리며 곡을 써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또 곡마다 색깔이 다 다르니, 5명의 작곡가가 본 김예림이 다 달랐다는 뜻이다. 앨범 재킷만 봐도 한장 한장 얼굴이 다 다르다. =그런가? 나를 보는 관점이 다 다르긴 했다. 내 목소리에서 좋아해준 디테일도 다 달랐고. 그렇게 회의를 하다보니 객관적인 게 없더라. 그래서 나도 직관에 더 의존했던 것 같다.
-작곡가들도 굳이 통일된 디렉션을 주지 않았을 것 같다. =디렉션도 다들 자기 음악이랑 정말 비슷하더라. 그걸 색깔에 비유하자면, 신재평님은 초록색, 조휴일님은 채도가 높은 파란색, 규호 쌤은 하얀색, 종신 쌤은 빨간색, 정준일님은 짙은 회색 정도?
-그 색깔들을 김예림만의 방식으로 다시 칠해내는 과정도 필요했을 것이다. =난 그냥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됐다. (웃음) 그러면 쌤들이 뺄 것과 더할 것을 알려주셨다. 다행히 내 느낌을 많이 존중해주셔서 당장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본 것 같다.
-첫 앨범에서 그런 도움과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맞다. <넘버원>도 원래 가이드는 ‘페퍼톤스’답게 더 밝고 달콤한 톤이었는데, 나랑 대윤이가 부르니까 살짝 눌러지더라. 흐릿한 느낌도 들고. 그 온도를 오히려 좋아해주시니까, 내 목소리를 어떻게 곡에 맞출까보다 내 목소리 안에서 어떻게 다른 느낌을 내볼까를 고민하게 되더라.
-≪A Voice≫라는 앨범 제목도 여러 가지 목소리를 담았다는 의미라고. 나름 욕심을 부려본 건가. =워낙 쟁쟁한 뮤지션들이 참여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 욕심낸 건 없다. 지금은 ‘내 색깔’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모호한 채인 나를 그냥 보여주자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앨범 제목을 ‘어떤’(a) 목소리라고 지은 것도 그런 이유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가보다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고. 그러니까 이번 앨범은 그냥, 시작이란 걸 한 거다.
-각각의 곡에 담긴 목소리 중 ‘보통 사람’ 김예림의 것에 가장 가까운 목소리는 어느 것일까. =말투나 발음은 종신 쌤이 내게 딱 맞게 만들어주신 곡이라 그런지 lt;All Right>. 성격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사를 보면 아직 내가 겪어본 일도 아니고 어찌 보면 심오한 내용인데, 의외로 그 감정이 쉽게 이해됐다.
-<슈퍼스타K> 시즌3 무대 위의 김예림은, 가수와 배우의 교집합을 새삼 느끼게 했다. 이번 앨범에서도 다양한 캐릭터를 오갈 줄 아는 배우의 ‘끼’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직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상상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가보다. 이번에도 가사 속으로 들어가 이 여자는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나를 많이 대입해봤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게 일종의 연기인 것도 같고.
-한편으로 김예림이 부른 노래는 단번에 알아차리게 할 만큼 뚜렷한 음색을 지녔다. 신인에게는 장점이자 한계일 것 같은데. =한계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오히려 내 목소리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내 목소리가 아니면 못했을 음악도 있으니까.
-‘하고 싶은 음악’이라면. =이번 앨범도 그렇지만, 장르적으로 구분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곡을 들었을 때 딱 오는 느낌이 있잖나. 아, 이건 이런 느낌이구나. 그 ‘이런’에 속하는 음악이랄까. 평소 장르 안 가리고 음악을 듣는 편인데, 각각의 장르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 다 다르다. 그 느낌들을 계속 찾아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