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을 직업으로 만든 사람이 있다. 건축가이자 시인(<56억 7천만년의 고독> <너무 아름다운 병>), 만화광이자 아티스트인 함성호가 그다. 몸담고 있는 분야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스스로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난감해 ‘오지래퍼’라는 명칭을 따로 만들었다는 그가 산문집을 냈다. 이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함 작가의 첫 카툰 에세이집인 이 작품은 글과 그림, 문화와 역사, 건물과 사람 사이를 거닐며 포착한 삶의 희로애락으로 충만하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관심사를 자랑하는 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함성호 작가와의 만남은 이러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됐다.
-최근 미얀마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건축주가 동남아 세공품으로 인테리어를 하고 싶다고 해서, 그걸 봐주러 간 거였다. 일주일 동안은 일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여행을 좀 했다.
-이번 산문집을 보면 다양한 장소에 대한 경험담이 많은데, 이번에 여행 가서도 혹시 글을 쓰진 않았나. =여행 다닐 때 뭘 잘 안 쓰는 편이다. 아, 그런데 이번에는 한편 썼다. 매체에 기고하는 글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에도 <씨네21> <동아일보> 등에 연재했던 글들이 수록되어 있더라. 어떻게 시작한 책인가. =언젠가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리다가, 그걸 블로그에 올리고 그림에 대한 글을 덧붙인 적이 있다. <구름을 만드는 공장>처럼 몇몇 에피소드는 이번 책에 수록됐다. 출판사 보랏빛소의 기획위원인 김한수 시인이 책을 내볼 생각이 없느냐며 연락이 왔기에, 그걸 보여줬지. 그랬더니 책을 내자고 하더라. 사람들 반응이 어떨까 싶어 <문학들>이라는 문예지에 일부를 발표해봤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그제야 책을 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쓰레기는 안되겠다 싶어서. 기존에 매체에 기고했던 글에 걸맞은 그림을 새로 그린 경우도 있다.
-<철학으로 읽는 옛집> <만화당 인생> 등의 산문집을 이미 내지 않았나. 어떤 점이 그렇게 걱정되던가. =산문집을 낼 때 항상 고민하는 점이 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글일까’라는 생각. 시집을 낼 때와는 많이 다르다. 시집을 낸다는 건 나에게 어떤 한 시기를 정리하는 의미다. 시집을 통해 하나의 결과물로 내 생각을 정리해야만 지금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시집을 낼 때는 좀 비장한 마음이 든다. 나 스스로에게 더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고. 반면 산문은 항상 효용성을 생각한다. 이번 책처럼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많이 담은 산문집은 처음 내본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내 사적인 이야기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더라. 이번 책은 그림도 함께 넣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림과 더불어 사적인 이야기를 하게 됐다는 건, 그림이 당신에게 글보다 더 사적이고 내밀한 표현수단이라는 의미인가.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그림은 속일 수가 없더라. 그림은 내가 느낀 무언가를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해주는 것 같다. 글은 좀 외교적인 것 같고, 그림은 내게 좀더 사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런 그림을 설명하는 글을 쓰다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좀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독자에게 내 내밀한 사진첩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미대 진학을 꿈꾸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다양한 미술 장르에 능통할 텐데, 카툰이란 형식을 굳이 선택한 이유는. =프랑스 작가 클로드 세르의 카툰을 굉장히 재밌게 봤다(20세기 프랑스 작가 클로드 세르는 판타지와 풍자, 블랙유머가 뒤섞인 특유의 스타일로 유명하다.-편집자). 오래전 그의 작품을 보며 나도 언젠가 카툰을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짬짬이 연습삼아 그림을 그리다보니 내 선이 나오더라. 카툰을 통해 현대 도시가 가지고 있는 기괴함을 한번 그려보고 싶었다. 책을 보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해골로 묘사한 걸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기괴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블랙유머를 끌어내보고자 했다.
-왜 사람을 어둡고 기괴하게 그렸나. =지구상에서 인간들이 가장 문제투성이니까. 잘해줘도 문제고, 못해줘도 문제고, 모르는 척해도 문제고, 아는 척해도 문제고. (웃음)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인간이 이제 육체적인 진화는 마쳤고 마음의 진화를 해야 한다고. 그런데 육체는 춥고 배고프면 진화할 테지만, 마음의 진화는 대체 어떻게 하는 건가. 그건 할 수 없다고 봐야지.
-사람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해 불신하는 편이다. 하지만 관심이 많으니 불신도 하는 거다. 이 모순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게 하니 재밌다. 투지가 생긴다. 내가 한번 인간들을 설명해보리라! 이런 생각도 들고.
-산문집 제목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인데, 책을 읽어보면 그 반대인 것 같다. 시를 쓰고, 건물을 세우고,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다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없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안 하니까 그걸 다 할 수 있는 거다. (웃음) <가을비, 박쥐우산> 같은 글은 정말 심심할 때 빗소리를 듣다가 떠오른 이야기를 쓴 거다. <구름을 만드는 공장>도 할 일이 없으니 조카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겪은 일이고. 아무 할 일 없이 멍하니 있을 때 사람의 촉도 서는 것 같다. 이번 책은 할 일 없이 지내거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궁리하던 시절에 나를 심심하지 않게 해준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독자들에게도 이 책이 심심할 때 읽을 수 있는 그런 작품이 되었으면 한다. 머리가 무거울 때 한두 꼭지씩 읽고 피식 웃을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가능할지 궁금할 것 같다. =사실 내가 무계획적인 사람이다. 그날그날을 살아갈 뿐이다.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즐거우려면 내일이 없어야 한다. 1990년대에 인도, 네팔, 티베트 등지를 돌아다닐 때 그걸 깨달았다. 외지에서 사기를 당해 돈을 다 잃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당해보니 괜찮은 거다. 그냥 당장 오늘 먹고 잘 데만 있으면 너무 행복하더라. 그때 내일이 있다는 게 좋은 게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