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3월22~31일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문의: 02-3668-0007
위안부 사건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2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수요집회가 벌써 1천회를 훌쩍 넘겼다.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자 자신의 아픈 과거를 들추면서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들에게는 일본 정부의 침묵도 큰 상처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은 우리 사회의 차가운 무관심이라 하겠다. 이해성 작/연출의 <빨간시>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기억하고, 상처를 보듬기 위해 마련한 하나의 제의의 장이다.
<빨간시>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사건 두 가지를 다루고 있다. 일제가 자행한 위안부 사건과 최근 계속 불거지고 있는 여배우(지망생)들의 성상납 사건이다. 시간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지만, 작가 이해성은 두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이 거대한 힘과 권력에 의해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육체적,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 사건의 가해자들(일본 정부, 언론과 재벌)이 이에 대해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고 있는 현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지 않은 채 덮여 있다는 진실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사회 비판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빨간시>는 비판과 질타를 넘어 용서와 해원의 경지로 나아가는 작품이다. 극중 위안부 시절 생긴 아들을 평생 미워했던 할머니(강애심)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니는… 하늘이 낸 사람이데이…” 하고 아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폭력의 결과로 생긴 아들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곧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 자신의 망가진 삶에 대한 아픈 용서와 화해를 보여준다.
또 한 가지 <빨간시>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폭력적인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침묵이다. 여기서 침묵은 두 가지로 보여지는데 그중 하나는 가해자(일본과 언론)의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가해자는 아니지만 이를 지켜본 자들의 침묵이다. 극중 동주는 여배우 수연에게 폭력을 쓰진 않았지만 사건의 목격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러한 동주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과 배우들의 성상납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폭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고, 모른 척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