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아를 임신한 아내를 둔 남자, 사라진 아버지를 찾는 딸, 자신을 따돌리는 세상을 단죄하려는 두 청년, 산속의 모텔을 지키는 고독한 여주인. 그들에게 ‘설인’의 시간이 찾아온다. 모두의 아버지이자 설산에 숨어 사는 그 신비한 존재와의 접촉을 통해 그들은 구원을 맛볼 수 있을까. 2013년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이 배출한 신인 이사무엘 감독의 <설인>은 묻고 있다. 지난해 CINDI영화제에서 버터플라이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는 현실에 찌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판타지와 스릴러라는 장르를 통해 한 다발로 묶어냈다. 그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쳐보며, 그가 경험한 <설인>의 시간에 대해 물었다.
-2001년 <고양이를 부탁해> 연출부였을 때 <씨네21>에 일기를 보내준 적이 있는데, 13년 만에 장편 데뷔작으로 만나게 됐다. 요즘도 일기를 쓰나. =그러게. 그때는 20대였는데 어느덧 40대가 됐다. 요즘에는 종이에 안 쓰고 집사람이랑 공유하는 비공개 카페에 일기를 쓴다. 이번에 <영화의 꿈을 향해 쏴라>에도 그 일기를 많이 활용했다. 이번에는 첫 장편 데뷔작이었기 때문인지 독자보다 나를 위한 기록의 의미가 컸던 것 같다.
-<설인>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 =강원도로 여행 갔을 때 산에서 받은 느낌이 있었다. 저 안에 아무도 모르는 외로운 존재가 혼자 살고 있다면 어떨까.
-그 여행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나. =<고양이를 부탁해> 끝나고 연출부 친구랑, 아카데미 졸업하고 출장 가는 집사람 따라, 두번 갔는데 둘 다 미래가 불확실한 상태였다. 영화 속 과거 20대의 현실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여러 캐릭터들의 전사 속에 IMF, 낙태, 동성애 등 현실적인 이슈들을 많이 집어넣었다. =직접적으로 사회문제들을 건드리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잘 살아가고 있나 묻고 싶었다. 예전에 신문 사설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설인의 모티브를 만들어낸 것도 물질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들이 먼저였나, 장르적인 틀이 먼저였나. =처음의 시나리오는 장르성이 훨씬 강했다. 장르를 통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됐기 때문이기도 할 거다. 하지만 내 목소리를 좀더 낼 수 있는 프로젝트였던 만큼 주제를 더 깊게 파고들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모텔에서의 실내극과 설산에서의 야외 액션을 모두 보여주려고 한 야심도 보인다. =시나리오가 통과되고 나서 잠이 안 왔다. 내가 써놓기는 했는데, 이걸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웃음) 경제적으로 생각하면 코언 형제의 <바톤 핑크>처럼 모텔촌 안에서만 찍는 게 적당했다. 하지만 설인이란 모티브를 빼면 나도 찍는 게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리한 면도 있다.
-마음에 드는 풍경의 설산을 찾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1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 찍기로 했는데 눈이 계속 안 오고 심지어 녹기 시작해서 매일 산을 더 높이 타야 했다. 근데 혹시나 싶어서 <친절한 금자씨> 찍었던 곳을 가봤더니 바로 느낌이 오더라. 다음날 촬영 때는 눈까지 와줬다. 내겐 기적 같은 날이었다.
-영화에도 고생이 묻어난다. =배우들까지 장비를 나눠 들고 매일 산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거기다 움직이면 자국이 남으니까 공간을 절약해 찍어야 해서, 김태훈씨는 눈에 파묻힌 상태로 몇 시간씩 있었던 적도 있다.
-‘박’ 캐릭터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배우들도 결국에는 다 박을 탐내더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살인마처럼 압도적인 캐릭터 하나가 나와서 주인공을 위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연민이 가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인물들이 많다. 이전 단편들의 시놉시스를 봐도 그렇다.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르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죄의식에 많이 끌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세상이 그저 밝고 살 만한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에 만들 CJ 버터플라이 지원작 <해파리>는 어떤 영화인가. =지금 20대들이 도시 속 범죄에 연루되며 악몽에 빠지는 이야기다. <설인>이 지금의 30~40대가 잃어버린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라면, <해파리>는 지금의 20대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여전히 장르적인 틀 안에서 우리는 잘 살고 있냐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