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까지만 해도 ‘올해의 음반 베스트100’이나 ‘올해의 영화 베스트10’ 같은 목록을,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그래미 어워드 등을 빠뜨리지 않고 챙겨 보았다. 혹시 내가 모르고 지나친 음반이나 영화가 있으면 어쩌나, 엄청난 걸작을 모르고 지나쳤으면 어떡하나 걱정하곤 했다. 걱정도 참 팔자로 많을 때였다. 얼마 전부터 ‘걸작 따위 지나갈 테면 지나가버려’라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으므로 수많은 명작들이 나 모르게 세월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모두들, 굿바이! 동시대 작품들을 부지런히 챙겨 읽고, 보고, 듣는 건 참 재미난 일이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 건져낼 수는 없다. 그랬다간 허리 부러진다. 그물코를 널찍하게 만든 다음 큼지막한 것들만 챙겨야지 그물코를 너무 촘촘하게 만들어두면 걸리는 고기들이 너무 많아서 그물이 찢어질 수도 있다.
음반이나 책이나 미술작품을 만나는 데도 운명 같은 게 작용하는 것 같다.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책이 어느 날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평소 같았으면 ‘이 무슨 삼류 쓰레기 같은 곡이냐’ 싶은 노래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경우가 많다. 자신만의 걸작은 객관적이지 않고, 다분히 주관적이다. 아무리 세기의 걸작이라도 내 마음이 황폐해 있으면 안으로 들이질 못한다(마음이 황폐했을 때 더 잘 들어오는 작품도 있고). 받아들이는 쪽의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내가 17살 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다 읽었다면 그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물론 지금도 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28살의 한가한 백수 시절에 그 책을 만났기 때문에 내 인생의 걸작이 될 수 있었다.
2012년에는 이 칼럼 덕분에 최신가요를 열심히 들었고, 얼마 전 열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도 관심이 갔다. 누가 상을 받는지 궁금했다. 어떤 뮤지션이 상을 탔는지는 알아서들 찾아보시고, 나는 최우수 랩-힙합 음반을 수상한 ‘소리헤다’에 관심이 갔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별을 헤는 마음으로 소리를 ‘헤는’ 그의 음악들은, 와우, 성긴 그물코에 걸린 큼직한 물고기였다. 묵직한 비트와 물결치는 멜로디는 참여한 래퍼들의 착착 감기며 펄떡이는 목소리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음악을 듣다가 <자리>(Position)라는 곡이 귀에 꽂혔다. 피처링에 참여한 래퍼 ‘졸리 브이’(Jolly V)의 계란판처럼 올록볼록하고 부드럽고 어질어질한 목소리에 (이따위 비유 죄송합니다) 매료당하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이 목소리는 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프리스타일’의 레이지(Lazy)와 비슷했다. 2000년 즈음 ‘프리스타일’의 첫 번째 앨범을 얼마나 열심히 들었는지 모른다. 오랜만에 프리스타일의 음반을 꺼내 들었다. 이제는 조금 촌스럽게 느껴지나 여전히 좋다.
이런 게 그물을 던지는 맛이지. 프리스타일과 소리헤다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물에 걸린 큼지막한 물고기들을 하나씩 꺼내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