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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성] 우아한 파격 조인성의 진화

5년 만에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로 돌아오다

TV를 보며 자동적으로 입담이 거칠어진다. 광고 속 조인성이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스테이크 타령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팬심이 들끓어 그 집 스테이크 맛이 싹 달아난다. 이 상태면 광고 효과 제로다. 김수현이 연기 에너지를 마구 분출하고, 송중기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착한 얼굴로 치고 나오는 세상에 조인성이 저럴 때는 아니지 싶었다. 애꿎게도 한동안은 <권법>을 준비 중인 박광현 감독에게 조인성 책임론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충무로에서 전에 없는 SF 히어로물을 만든다고 하곤, 예의 열과 성과 에너지를 모두 보여주고선, 그리고 시나리오를 읽은 조인성과 함께 펑펑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던 박광현 감독은 ‘곧 들어갑니다’라는 말로만 그를 묶어둔 장본인이다. 조인성이 자의로 발목을 잡힌 건 분명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꿈쩍 않은 채 그의 재가만을 기다리는, 분명 괜찮은 시나리오를 하나둘 남김없이 고사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TV를 켜니 또다시 스테이크 광고다. 화가 나는데,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해맑은 미소는 그대로다. 노희경 작가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2011년 5월4일 군제대 뒤, 조인성이 선택한 첫 작품이다. <봄날> 이후 8년 만의 드라마고, 공군 입대 전 마지막으로 한 영화 <쌍화점> 이후엔 5년 만의 작품이다. 그리고 조인성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바닥날 지경에서 가까스로 우리를 구원해준, 그의 새로운 시작이다.

조인성에게 이 선택은 어떤 의미일까. 돌이켜보면 매 작품 그를 몰아온 건 일종의 강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로 연기상을 받기 직전까지도 그는 연기에 대해 질타를 받아야 하는 ‘얼굴 잘생긴 배우’로 수식됐고, 그가 유하 감독의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사각팬티 차림에 등짝 가득 문신을 하고 불량스러운 깡패를 연기했을 때, 조인성의 연기에 앞서 도드라지는 건 규정된 스스로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배우의 열망이었다. 발차기가 어색할 정도로 큰 키에, 아름답다는 말 외엔 달리 규정할 수 없는 마스크, 언제까지고 청춘일 것 같아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해맑은 표정, 어쩌면 이 우월함이 남자배우로 인정받는 데 더 큰 장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그는 매 작품 달라지기 위한, 더 어른이 되고자 하는 선택을 해왔다. 지금의 그는, 다른 건 몰라도 더이상 그런 안달을 낼 필요가 없는 어른 남자가 되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치기어린 정재민이 지나간 자리,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오수는 저 하나 살려고 사기를 치다, 자신의 재산을 뺏으려 급급한 주변에 환멸을 느끼고 죽으려는 시각장애인 오영(송혜교)을 만나 그 여자와 다 타버릴 것 같은 사랑에 빠지는 뜨거운 남자를 연기한다.

“절대 시크해질 수 없는, 이 사랑의 운명에 젖어 있는 남자다.” 노희경 작가는 조인성을 “내가 본 어떤 배우보다 남자답다”고 규정한다. “상처받은 것 같은데도 순수함을 견지하는, 그래서 절대 거짓말을 못하고 또 시원시원한 남자의 성격이다.” 그런 그를 보며 노희경 작가는 “이번만큼은 이 친구에게 맞춰보자”는 전에 없던 ‘호의’를 베푼다. 그만큼 조인성을 믿는다는 뜻이다. “배종옥 이후에 이렇게 자신있는 배우를 본 적이 없다. 자신감이 없다면 부끄러워할 텐데, 그 친구는 스스로 뭘 못하는지 정확히 알고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기필코 해내려고 한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연출하는 김규태 감독 역시 예상 지점을 깨고 자신만의 스타일과 톤을 구사하는 조인성에게 대놓고 ‘반했다’는 찬사를 쏟아낸다. “현장 분위기를 주도하는 쾌활한 모습이다가도, 일껏 대사를 준비해 오고서도 현장에서 송혜교가 하는 대사를 듣고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성이 풍부하다. 인기 스타, 미소년 같은 외모만으로 그를 알았는데, 옆에서 보니 감성적인 마초더라.”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밤샘 촬영이 이어지던 날, 조인성은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이고 <씨네21>의 촬영장에 왔음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카메라 앞에 선다. ‘왜 이렇게 오랜만이냐’고 따져 묻자 “그렇죠”라며 오랜만에 돌아온 현장의 소중함을 하나둘 이야기해준다. 인터뷰 도중, “인터뷰를 하는 것도 너무 재밌고 즐겁다”며 웃는 그에게 더이상 오랜 공백을 추궁하는 건 바보 같아 보였다. <쌍화점> 때 만난 날선 배우의 모습과 달리 편안한 기운이 인터뷰 내내 그를 감싼다. 예전보다 파이팅은 덜하고 투지는 조금 덜어냈지만 대신, 그 자리에 삼십대에 맞는 여유와 성숙함을 채워 넣은 그는, 어쩌면 우리가 몰랐던 조인성의 진짜 모습일지 모른다. “모두들 조인성을 보면 새로운 걸 발견하려고 하는데, 난 이미 발견한 조인성의 장점을 쓰고 싶다. 그게 그의 새로운 모습이 될 거다”라고 자신하던 박광현 감독의 말이 떠오른다. 굳이 극적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야 할 조인성의 모습은 무궁무진하다. 곧 오수가 보여줄 이 겨울의 바람이, 기다려진다.

-<쌍화점>(2008) 때 만났으니 인터뷰한 게 벌써 5년 전이다. CF에는 계속 나오는데, 두문불출했다. 이제는 좀 만날 때가 됐다 싶었다. =작품으로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그래야 할 이야기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군생활을 궁금해하시는 분도 많았다. 어떤 시인의 글에 잎이 변한다고 해서 산이 변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 군대를 다녀왔다고 해서 내가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군대는 나보다 어린 동생들도 다녀오는데 제대하고 나서 그게 큰일인 것처럼 ‘내 군생활은 이랬습니다’ 말하는 게 쑥스러웠다. 2년 정도 시간이 흐르니까 이제야 그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침까지 촬영을 하다 왔다고 들었다.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한 기분은 어떤가. 김규태 감독은 촬영장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고 칭찬하더라. 좀 전에 동영상 인터뷰를 하면서 현장에서 일하는 게 너무 좋다며,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보고 말았다. =밤샘 촬영을 하고 집에 와서 느낀 게 있다. 다들 힘든데 현장에서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걸 만드는 과정 자체도 굉장히 이상적인 상황인 거다. 얼마 전에 <SBS 리얼다큐 땡큐-스님, 배우 그리고 야구선수>라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혜민 스님이 “미래에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불안해하면서 괴로워하는데,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니 괴로운 거다”라고 하시더라. 사실 무한 경쟁 사회 아닌가. 어떤 작품을 하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경쟁이 시작된다. 나는 여기서 반드시 이기고 승리해야 한다는 게 목표가 아니다. 결과물로 평가받아야 하지만 이는 결국 하늘의 뜻이다. 몸은 힘들지만 다 같이 웃을 수 있었던 그 순간의 행복, 내가 쉬는 동안 그걸 잊고 있었구나 싶더라. 나는 참 현장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제야 비로소 그걸 알게 된 것 같다. 결국에는 이런 소중한 찰나가 모여 내가 완성됐다는 것 또한.

-물리적으로 기술적으로 적응은 잘되던가. 오랜만이라 몸이 굳었을 수도 있을 듯싶은데. =다행히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활동하면서 어색함을 느끼는 순간은 새로운 스탭과 만나서 처음 작품을 시작할 때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안면 몰수하고 뭔가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다. 이 사람이 날 어떻게 볼까 심장이 콩닥콩닥했다. 개런티도 많이 받으니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웃음) 스탭들이 내가 울어야 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 ‘에이, 조인성 개런티 값 못하네’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박광현 감독의 <권법>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차기작을 선뜻 결정하지 않은 건 충무로에서 누구나 아는 걱정거리였다. 그사이 드라마, 영화 제안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많은 작품 중 노희경 작가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선택했다. =뮤지션은 자기 상태를 곡으로 옮겨서 지금 심리와 생각을 표현한다. 배우들은 그걸 작품을 통해서 표현해야 한다. 작품의 질을 떠나 그동안 나를 건드리는 캐릭터와 작품이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작품이 내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복귀작으로 <권법>을 결정한 것도 그 작품의 캐릭터가 나와 맞아떨어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여태껏 보여준 어떤 이미지들이 있었다. 멜로드라마 속 백마 탄 왕자일 수도 있고, <비열한 거리>의 깡패일 수도 있다. 난 늘 예전의 그 이미지를 한번 더 보여주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걸 하고 싶었다. 나이 먹으면 무서워서 도전 못한다, 가족 생각하느라 도전을 꺼리게 된다, 는 선배들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도전할 지점이 중요했다. 단지 노희경 작가님이 유명해서 선택한 게 아니다. 원래 작품 선택할 때 작가나 감독의 이름을 배제하고 본다. 다른 배우에게 이 캐릭터가 갔을 때 내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거절하는데 이건 정말 안되겠더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도전하고 싶었고 이걸 잘 만들어내면 앞으로 내 연기 인생에 깊이 남을 또 다른 배움이 되겠구나 싶었다. 선생님과 치열하게 작업하고 혼날 생각 하더라도 배운다고 생각하면 재밌고 좋았다.

-다양한 역할을 해왔지만 멜로드라마에서는 논외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정재민이 가진 이미지, 그늘이 절대적이다. 냉정한 외피에 여리고 다치기 쉬운 마음을 숨긴 청춘이었다. 정재민과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오수는 분명 다른 사람이고, 그 시점에서 연기를 했던 조인성도 지금의 조인성과는 많이 달랐을 텐데, 본인이 느끼는 변화는 어떤 건가. =많은 분이 조인성의 진화를 바라는 것 같다. 나 역시 그걸 바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사이 나도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 메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들도 있지만 나는 조인성을 완벽히 버리고 연기할 수가 없다. 그러니 시간이 흘렀지만 내 연기에는 나만의 색깔이나 일맥상통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예전의 조인성을 배제하고 완벽히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면 실망하실 거다. 만약 그런 새로움을 기대한다면 이 역할은 나 말고 다른 배우가 해야 하지 않을까. (웃음) 그렇다면 계속 음지로 더 파고들어가 비교 지점이 생길 수 없는 캐릭터만 해야 하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힘든 이야기다. 예전에는 달랐다. 연기나 외모가 가진 한계라고 해야 할까 이런 문제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 그악스러운 모습을 끄집어내면서 연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생애는 운 좋게 부모님이 좋은 키와 얼굴을 주셨으니까 이걸 감사하게 잘 쓰고 싶다. 이걸 충분히 활용하는 것도 내 몫인 것 같다. (웃음)

-오수는 부모한테 버림받고 첫사랑마저 죽은 뒤 오직 돈을 보고 살아가는 도박꾼이다. 밑바닥 삶을 전전하는, 전에 없이 거칠고 현실적일 수 있는 캐릭터이고, 그래서 조인성의 멜로 라인에선 유독 새로운 캐릭터다. =원작인 일본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이 돈을 찾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초점이라면 우리 작품은 남자가 더욱 극한 상황에 놓인다. 단순히 속물적인 면모가 아니라 내적인 갈등이 많은 인물이라서 원작의 인물과 많이 다르다. 감정 라인이 섬세하다보니 대본만 외울 때는 괜찮았다가도 현장에서 혜교 대사를 듣다가 훅 하고 감정이 밀려올 때가 있다. 대본 읽을 때와 연기할 때 감정이 다르게 올 때가 많았다.

-노희경 작가는 “인성씨가 보여주는 오수는 내가 생각하는 오수와는 조금 다르다. 그런데 그가 그려내는 오수가 괜찮더라. 이 친구한테 한번 맞춰보자 생각했다”라고 하더라. 기존 캐릭터들이 노희경 작가의 작품에서 그 문법을 익히며 살아갔다면, 유독 후한 대접을 받는 게 아닌가 싶다. =노희경 작가님은 배우에게 작품을 공동의 작업으로 여기게끔 만들어주시는 분인 것 같다. 워낙 대가이기도 하고 배우인 나로서는 작가님이 좀 어려운 부분도 있었는데 노희경 작가님이 먼저 그런 부분을 편하게 생각하게 만들어주셨다. “네가 어떻게 발성을 하고 호흡을 하든 상관없다. 내가 썼던 맥락과 똑같이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내 색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신이 주는 상황과 뜻을 이해하고 캐치하면 문제 되지 않는다”라고 하시더라. 완성된 1부를 보시더니 “내가 이렇게 쓰진 않았지만, 네가 생각한 게 맞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지금은 편하게 서로 이야기하고 작가님 말씀을 듣고 하면서 촬영하고 있다.

-즐겁게 작업하는 중에도 역시 고비가 있을 것 같은데, 이번 작업의 난점은 무엇인가. =추위다!

-그러고보니 유독 겨울이 배경인 작품이 많다. 그 유명한 조인성 패션도 모두 겨울 슈트와 머플러로 완성됐다. (웃음) =겨울은 늘 일하는 계절이다. 스키장에 가본 적이 없다. 게다가 올 겨울은 유독 추운 것 같다. 하필 내가 살아 있을 때 56년 만에 한파가 오다니. (웃음) 워낙 추우니까 현장에서 입이 안 벌어져서 미치겠더라. ‘배우가 입이 안 벌어지는 것은 현장이 영하 15도여서 그런 거니 양해 바랍니다’라고 자막을 쓸 수도 없고. 이런 상황에서 감독님은 춥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하시는데 너무하신다 싶었다. (웃음) 아무리 연기라도 사람 뜻대로 추운 걸 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야외가 아니라 세트라도 마찬가지다. 종합편성채널이 생기면서 부쩍 세트장이 모자란다던데, 그래선지 난방 잘되고 소음 차단도 잘되는 세트가 별로 없다. 우리 촬영장 옆에는 헬기 기지가 있어서 20분마다 헬기가 뜬다. 더 빨리 찍을 수 있는데 시간이 늘어나니 속상하더라.

지루하지 않은 배우가 되고 싶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흥행과 연결짓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작가로서도 이번 작품이 드라마 <바보 같은 사랑> 이후 본격적으로 원작을 가지고 매달린 작품이다(<바보같은 사랑>은 소설 <우묵배미의 사랑>이 아닌 장선우 감독의 버전만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고집해왔고, 원작을 가지고 작품을 하는 데 인색한 작가다). 원작이 가진 대중성을 볼 때, 노희경 작가와 대중의 새로운 접점이 될 작품이기도 하다. 그 역할을 조인성과 송혜교라는 스타 배우가 나눠 가졌다는 기대와 책임도 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물론 내게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흥행을 떠나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결국에 선택하게 된다고. 내 마음을 움직인 이 작품은 흥행작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기보단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존재했고, 그래서 빠져들게 되더라. 예를 들어 <골든 타임>의 최인혁 교수를 보면서 저런 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드라마에 김기방이라고 고등학교 때 내 짝이 나오는데, 그 친구에게 내가 감기 걸렸는데 최인혁 선생님 좀 만나고 싶다고 농담도 했다. 나도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 <네 멋대로 해라>는 방영 당시에 시청률 1등을 하진 못했는데 여전히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로 꼽히지 않나. 흥행 여부보다 저 배우가 계속 좋은 작품에 나와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네, 하는 기대치를 높여주는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창피하지 않은 작품을 만드는 게 내 첫째 목표다. 1등을 하든 2등을 하든 그건 그다음 문제다.

-결국 빠져들 작품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다. <권법>만 봐도 계속 미뤄지는 동안 다른 제안이 많았는데, 그 작품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권법>은 올해는 꼭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린다) <권법>은 시나리오에 대한 호불호가 워낙 갈리는 작품인 데다, 의리로만 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게다가 감독과 전작의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엔 작품에 빠져들었다. 근데 좀 지나니 작품을 떠나 사람이 좋아지더라. 지금은 의리나 무엇을 떠나 그냥 난 이 작품을 해야 할 것 같다. 일단은 같이 만들어서 영화관에 걸고 싶다. 감독님이란 사람을 좋아하고 신뢰하게 됐고, 감독님을 위해서라도 이걸 한번 영화관에 걸고 싶다.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고 싶다. 실리가 없는 의리는 의리가 아니라고 한다. 또 의리 이전에 예의라는 게 있다. 다른 커넥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분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영화를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영화관에 꼭 걸고 싶다.

-당장 소속사나 주변 사람들의 회유와 간청은 어떻게 거절하고,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왔나. =운 좋게 난 작품을 선택하는 데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뭣보다 내 판단에 따라 작품을 선택해야 후회가 없다. 잘될 거라는 확신만 믿고 선택했다가 그게 뜻대로 안됐을 경우 난 보상받을 길이 없다. ‘거봐, 그 말만 믿고 선택했다가 실패했잖아’ 이런 생각이 들면 내가 피폐해지지 않겠나. 내가 선택한 거라면 오히려 ‘내 판단이 틀렸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그게 보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잘됐으면 좋겠다.

-<권법>에서는 SF물의 히어로 역이다. 박광현 감독은 연기 주문보다는 조인성이 가진 유머, 불의를 못 참는 돌직구 스타일을 스크린에 옮겨놓고 싶다는 욕망이 더 크다고 하더라. 새로운 걸 발견하기보다 지금까지 작품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면모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보자는 의도다. 조인성이란 배우는 지금껏 항상 극적으로 활용되어왔고, 스스로도 전작을 부정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걸 즐겨왔는데, 그런 면에서 이번 선택은 좀 달라 보인다. =감독님이 나를 캐스팅한 이유가 <권법>의 캐릭터와 싱크로율이 높아서라더라. 사랑을 많이 받는 배우여서, 혹은 조인성의 다른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인성이란 사람을 만나보니 마음에 들었던 거다. 그러니 편안하게 그 상태로 현장에 오면 된다고 하더라. 그전까지는 내가 음지에 있는 작품을 선택해왔다면 이 작품에선 <웰컴 투 동막골>처럼 실제론 슬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가벼운 터치를 받았으면 한다. 이십대의 내 필모그래피를 지금 보면 좋았던 선택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선택도 있었다. 작정하고 한 의외의 선택이기보다는 지루하지 않은 배우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지금은 선택에 대한 평가를 미뤄두고 한참 지나 내 선택을 평가하려고 한다. 세월이 지난 뒤에, 조인성이 이런 길을 걸으려고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다.

-공백기에 새로운 배우들이 끊임없이 주목받아왔다. 연기력과 스타성으로 무장한 동료들, 또 후배 배우들이 조인성의 자리를 채우기도 했다. 사람인지라 불안감도 있었을 텐데. =그럴 땐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경쟁 사회에서 빠져나와서 나만을 생각했다. 지인이 좋은 게 그럴 때 위로받고 힘을 얻게 된다. 군대에서 읽은 책들도 도움이 됐다. ‘나이와 경험은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산에 빨리 올라갔다고 해서 그게 산의 높이가 아니다.’ 그런 말들이 내 불안을 가라앉혔던 것 같다.

-책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군대에서 사서삼경을 독파했다는 이야기는 뭔가. (웃음) =무조건적으로 서양의 글을 맹신하지 말라고 하지 않나. 그들의 관점에서 보는 세상이니까. 그런 면에서 사서삼경을 읽는 것은 궁금한 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도덕책에서 보고 막연하게 외웠던 것을 다시 유심히 봤다. 진짜 ‘예의’가 뭔지 알고 예의가 있는지 없는지를 구분하고 어떤 기준을 잡고 싶었다. <맹자>를 보다가 사서를 보고 삼경을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성경도 보게 되고 혜민 스님, 법륜 스님 책도 읽게 됐다. 인생에 대해 선인의 말씀을 듣고 싶었다. 현명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직 지극히 젊은 나이지만, 연예계에서 배우의 나이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델리스파이스의 노래를 들으며 자전거 타고 강변을 달리던 <학교3>의 풋풋한 고등학생은 이제 조인성의 과거가 됐다. 그렇게 나이가 들고, 새로운 얼굴을 찾게 되는 건데,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나. =그간 오래 작품을 하지 않아서 내 비교 지점이 저 멀리 과거이기 때문에 외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 것 같다. ‘안티에이징’보다는 ‘웰에이징’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안티’는 일단 시간을 멈춰야 하는 것 아닌가.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늙어가는가다. 분명한 건 앞으로 내가 계속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배우의 가장 큰 장점이 그 나이 드는 모습 또한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보면, 그는 한때 미소년의 인상을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지금은 아무도 얼굴만 가지고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정우성을 보며 동경하던 어린 시절의 조인성처럼, 이제 후배 배우들이 조인성을 본받고자 하고 멘토로 언급하고 있다. =아마 나를 콕 집어 멘토라고 언급한 후배는 없었을 거다. 가르침을 준다기보다는 같이 즐겁게 어울리고, 술값만 내가 낸다. 그러니 누가 싫다고 하겠나. (웃음) <골든 타임> 최인혁 교수님의 말씀을 빌리면 그분이 “나를 멘토로 삼지 말아라”라고 했다. 나는 그냥 좋은 형이고 싶다. 그래서 권위의식을 빼고 다가가는 것이고.

-<비열한 거리>에서 <쌍화점>까지 2년이 걸렸다. 비록 지금은 좀 오랜만이지만 원래도 다작을 한 배우는 아니었고, 팬들은 2년 정도 텀은 기꺼이 기다릴 수 있었다. 앞으로는 어떤가. =군 제대 직후에는 계획이 꽤 있었다. 아직 기획 단계라 이걸 합니다 하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추진 중인 작품들이 있다. <권법>은 감독님이 ‘이번엔 꼭 들어간다’고 하시고. 매번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이번엔 꼭 갈 것 같다. (웃음) 연이어 영화와 드라마도 계획 중이다. 생각대로 되면 1년에 한 작품씩 돌아가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자주 작품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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