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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소망
2002-02-01

편집장

<나쁜 남자>가 개봉한 뒤로 2주 연속 김기덕 논쟁을 실었더니, 우리 온라인사이트에 어떤 이용자가 “이건 결국 김기덕 키워주기이고, 편들기”라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두번도 부족해 이번에 또 김기덕 논쟁을 실었으니, 그런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게 뻔하다. 그래서 제 발 저린 자로서 변명 겸 해명을 좀 하고 싶다.

특정한 감독이나 영화 키워주기가 아니냐는 독자의 항의를 듣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개봉했을 때도 들었고, <취화선> 동행기 실었을 때도 들었다. 이런 비판, 안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잡지 만드는 사람들이 제일 신날 때는 박수쳐주고 싶은 영화 혹은 영화인을 발견하고, 신나게 박수칠 때다. 그건 그 자체로 즐겁다. 아니, 잡지 만들면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을 포기하고 엄격하게,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잡지를 만들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그럴 자신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박수칠 의욕이 샘솟지 않는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해서, 혹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서, 지면 할애를 하는 경우도 꽤 있다. 독자가 있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잡지로선 그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실 제일 뜨끔한 비판은 왜 특정영화(인)를 키워주느냐가 아니라, 왜 줏대 없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그러느냐, 하는 말이다.

그런데 <나쁜 남자>의 경우는 어느쪽도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생각은 이렇다. <나쁜 남자>와 김기덕 감독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이 논전은 예사롭지 않다. <섬> 때도 찬반론이 있었지만, 그때도 많이 다르다는 것만 확인하고 지나가버렸다. 그러다 그와 유사한 논전이 재현됐다. 아니, 더 커졌다. 문제는 그 찬반이 예전과 같은 지점에서 다시 출발해, 더 커진 다름만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린 논쟁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논쟁의 목적은 합일이 아니라, 차이의 이해다. 차이의 이해가 깊어지지 않는 논쟁은 복수의 독백일 뿐이다.

영화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내) 영화는 잠시 켜져 있다 꺼질 촛불일뿐”이라는 이창동 감독의 말은, 안타깝지만 겸손이 아니라 영화에 관한 진실이라고 믿는다. 왜 우린 한편의 영화를 놓고 이렇게 들떠 칭송하거나 격렬하게 혐오하고 있을까. 그러고 있는 우리와 그렇게 만든 대상 양쪽이 모두 궁금했다. 정말 ‘논쟁’이 필요한 것이다. 세번째 논쟁도 그래서 마련했다. 그리고, 영화계 밖의 두 논자들은 기꺼이 귀기울일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말 반가왔다. 독자 여러분도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