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어쩐 일로 여행이 잦다. 산만 한 덩치로 비행기를 타야 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여행 준비를 하면서 짐을 싸는 일도 매번 어렵다. 짐을 싸는 건 여행 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미리 예측하는 일이라서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소설가라면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는 일에 도가 텄을 법도 한데 소설과 현실의 상상은 무척 다른 모양이다. 여행 중에 아프면 어떡하나, 일회용 면도기가 없는 곳도 있지 않을까, 책을 읽을 시간이 있을까, 이어폰과 헤드폰 중에는 어떤 게 나을까, 비행기에서는 헤드폰이 낫지만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보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다 들고 갈 수도 없고, 안 들고 갈 수도 없다. 여행 고수들은 최소한의 짐을 꾸리는 일에 익숙하다는데, 고수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최후의 가방을 꾸리면서 짐싸기의 효율을 평가해본다. 한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 꼭 있다. 들고 갔지만 읽지 않은 책이 있고, 챙겨갔지만 쓰지 않은 약들이 있고 (이건 다행이고) 꾸역꾸역 넣었지만 한번도 입지 않은 스웨터가 있고, 넉넉하게 준비해 간 까닭에 입지 않은 속옷이 있다. 비효율적인 짐싸기다. 트렁크 속에 한번도 쓰지 않은 물건들을 다시 넣다보면 효율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입지 않은 스웨터, 입지 않은 속옷, 보지 않은 책도 트렁크에 필요하다. 사무실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한명씩 꼭 있듯, 예비명단에 포함되어 긴 여행길에 오르지만 잔디도 밟아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선수들이 있듯, 전자제품과 함께 들어 있는 수많은 전원 어댑터 중 한번도 쓰지 않고 버리는 종류의 것이 있듯, 때로는 부피를 줄일 수 없는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짐이 커지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번 여행길에는 음악을 거의 챙기지 않았다. 음악을 들을 만한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스케줄을 보면 대충 안다. 전부터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예상이 맞았고, 벤 폴즈의 신보를 잠깐 들었을 뿐 다른 음악은 거의 듣지 않았다. 딱 하나 챙겨간 신보가 캐스커 거였다. 제목이 ‘여정’인 데다 주위에서 좋다는 얘기를 많이 해서 여행길에 들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마음 편하게 음악을 듣고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캐스커의 멜로디를 좋아하고, 언제나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쓸데없이 들고 온 물건들을 다시 가방에 넣고, 쓰지 못한 물건들을 다시 가방에 넣고, 입지 않은 새 옷을 다시 접어서 가방에 넣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막 첫 번째 노래 <Intro>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온다. 역시 융진의 목소리는 좋군. 음, 시작이 좋다. 다음 곡은 <The Healing Song>, 제목은 별로지만 캐스커답게 달리기 시작한다. 그래,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