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서울아트시네마의 김보년씨가 “자막 작업용으로 <오루에 쪽으로>의 DVD를 빌려달라”고 했다. 시네바캉스영화제 상영작이라고 했다. 몇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첫째, 자크 로지에의 영화를 드디어 필름으로 보게 돼 기뻤다. 둘째, 그런데 왜 더 유명한 <아듀 필리핀>이 아니고 <오루에 쪽으로>일까? 엉큼한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속이 궁금했다. 셋째, 어김없이 찾아온 휴가의 계절이 난 슬펐다. 그리고 다시 몇 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올해도 휴가 없이 지난 여름을 마쳤다. 프리랜서로 지낸 지난 몇년 동안 휴가를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당연한 것인 양 즐겼던 해외여행은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따로 휴가가 없는 난폭한 생활에 적응하게 됐다.
<오루에 쪽으로>는 해변의 빌라로 늦은 휴가를 떠난 세 여자의 이야기다. 직장 동료가 의도적으로 찾아오고, 또 다른 남자가 끼어드는 것 외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 여자는 바다와 햇빛과 바람과 파도와 잠과 음식을 즐길 따름이다. 바캉스는 비우는 것이다. 떠난 곳에 서조차 채우려 하는 사람들과 달리, 세 여자는 몸과 머리에 들러붙었던 일상의 더께를 지워나간다. <오루에 쪽으로>는 무의 상태에 다가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임을 일깨운다. 극중 거실의 시계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내 기분은 묘했다. 영화나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크기의 시계. 하긴 세 여자를 유일하게 누르고 있는 건 ‘시간의 무게’다. 그들은 언젠가 한가로운 바캉스를 마치고 북적대며 살던 지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무의식으로 느낀다. 며칠 뒤, 사무실로 복귀한 여자는 잡다한 욕망으로 돌아가는 현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의 아린 눈빛이 무얼 그리워하는지 나는 안다. 지난여름의 바닷가.
지난해 부천영화제 상영작인 쿠엔틴 듀피욱스의 <광란의 타이어>는 왜 영화가 장면마다 이유를 찾아야 하냐고 따지는 작품이었다. 듀피욱스의 황당한 주장은 로지에의 영화에 기원을 둔 것처럼 보인다. 로지에의 대표작 <아듀 필리핀>은 의미없어 보이는 순간들(의 소중함)에 관한 영화다. ‘오루에’에 별뜻이 없듯이, ‘필리핀’은 놀이의 이름에 불과하다. 1960년, 방송국의 카메라 조수인 미셸은 스튜디오 입구에서 기웃거리던 릴리안, 줄리엣과 친분을 쌓는다. 얼마 뒤, 그는 징집을 앞두고 떠난 휴양지에서 두 여자와 우연히 만난다. 세 청춘은 놀고 실수하고 웃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다툰다. 그리고 작별한다. 길에서 만난 남자가 험담한 대로, 그들은 결코 낙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연 속을 떠도는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은 최소한 낙원 근처를 서성인다. 삶의 대부분은 소소한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들이 소중하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로지에는 그 순간들을 영화라는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아둔다. 영화를 모를수록 로지에의 영화를 보는 내 시선이 더 자유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영화와 로지에 영화의 간격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어쨌든 로지에의 영화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서보다 인간답고 낭만적이고 유머러스하며 평범하면서도 신선한 인물이 나오는 아마도 유일한 프랑스영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