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오지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질 뻔했다. 영화 <미인> <아이 러브 유>에 출연할 당시 그는 그저 얼굴만 인상적인 배우였다. 스스로도 잘 알았다. “살면서 크게 욕 먹은 적이 없는데, 연기를 하면서 욕을 참 많이 먹었다.” 그러나 욕은 약이 됐다. 2년의 와신상담 끝에 출연한 드라마 <두번째 프러포즈>를 시작으로 오지호는 ‘잘생겼지만 친근한’ 배우로 거듭났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 <내조의 여왕>의 허술한 남자 캐릭터는 어느덧 그의 대표 이미지가 됐다. 그가 원래 남성미 철철 넘치는 배우란 걸 다시금 일깨워준 작품은 <추노>다. <추노>의 노비로 전락한 조선 제1의 무사 송태하는 믿음직함으로 무장한 캐릭터였다. 그리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오지호는 지금껏 자신이 쌓아온 이미지를 조금씩 겹쳐놓은 것 같은 캐릭터를 연기한다. 서빙고 별감 백동수는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무사지만 허점도 많은 남자다. 그는 덕무(차태현)와 짝을 이뤄 진지하게 유머를 구사한다. 물론 그 유머는 박장대소할 만한 것도 아니고 백발백중도 아니다. 대신 그는 상황에 조화롭게 녹아들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히 알고 있는 배우 오지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자신의 연기 인생에 순풍이 되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5년 만의 영화 출연작 <7광구>의 흥행 성적이 저조했다. 기대가 컸을 텐데. =그땐 많이 속상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3D블록버스터인데, 그 최초의 의미가 색이 바랬다. 어쨌건 평가는 관객이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호흡을 맞춘 동갑내기 배우 차태현에겐 ‘흥행배우’, ‘2천만 배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내심 부럽지 않나. =대단한 놈이야. (웃음) 솔직히 부럽지. 촬영을 해보니까 태현이가 가진 힘이 있더라. 신을 살리는 힘도 있고, 말도 안되게 웃기는 힘도 있고, 여유도 있다. 내가 가지지 않은 걸 태현이는 가지고 있더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한·중·일 합작 드라마 <스트레인저6>를 찍고 한국에 들어온 뒤 시나리오를 받아보게 됐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확실한 게 마음에 들었다. 캐릭터들이 살아 있고, 얼음 CG만 잘 나오면 이 영화가 괜찮겠다 싶어서 흔쾌히 출연했다.

-코믹을 기본으로 하는 다른 캐릭터와 달리 서빙고 별감 동수는 진지하고 멋있는 인물이다. =원래 감독님은 작정하고 멋있는 인물을 생각하신 것 같다. 난 생각이 달랐다. 이 정직하고 진지한 캐릭터에 위트를 넣었으면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이 지루해할 것 같았다. 내 컷도 후루룩 넘어갈 것 같았고. (웃음) 그래서 방향을 살짝만 틀어보자고 했다. 그리고 무사이니 액션장면이 많았다. 액션 신은 기본적으로 지루하지 않은 데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해서 무술감독님과 얘기만 잘하면 좋은 장면이 나올 것 같았다.

-한편으로 동수는 <추노>의 캐릭터 송태하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하다못해 분장을 할 때도 신경이 쓰였다. 수염을 기르면 <추노>의 느낌이 확 날 텐데 싶어 수염을 밀었다. 그리고 <추노>에선 월도를 들고 다니는데 여기선 월도는 한번밖에 쓰지 않는다. 아예 들고 다니질 않거나 검을 쓴다. 똑같은 무사 캐릭터이긴 해도 동수는 결국 서빙고를 지키는 별감이다.

-고난도의 액션을 소화한다.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트레이닝은 2주 정도 받았다. 그런데 무술감독님이 ‘지호씨한텐 미리 합을 가르쳐주지 말라’고 하시는 거다. 자랑은 아닌데, 내가 합을 잘 외우는 편이다. (웃음) <추노> 때 워낙 단련이 돼 있어서 그런지 합 같은 건 한번 보면 쭉 흐름이 파악된다. 무술감독님이 보기엔 너무 합을 맞춘 티가 났나보다. 그래서 기본동작만 외우고 현장에서 세부동작들을 익혔다.

-빙판 위에서의 무술장면이 인상적이다. =강원도의 어느 꽁꽁 얼어 있는 호수에서 촬영했다. 아이젠을 신발에 차고 촬영했는데, 계속 아이젠이 떨어져 나갔다. 또 하체가 고정이 안되니까 합이 계속 흐트러지더라. 그 장면만 일주일 정도 찍은 것같다. 그런데 찍을 땐 고생도 많이 했고 얼음 위 액션이 밋밋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화면으로 보니까 미끄러지면서 지탱하고 한 바퀴 돌고 이런 장면들이 멋있게 나오더라.

-덕무가 귀향 가 있는 동수를 찾아가는 장면은, 감독이 오지호를 위해 마련한 장면이구나 싶더라. 그때 동수는 상의를 탈의한 채 혼자 무예를 닦고 있다. =대본대로 한 거다. 그땐 살을 좀 뺀 상태였는데, 개인적으론 당시의 몸 상태가 불만족스럽다. 근육의 윤곽이 로봇처럼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덕무의 대사에도 있지만 사실 헬스장 몸은 아닌 거지.

-개그 욕심이 엿보인다. =욕심 있다. (웃음) <미인> <아이 러브 유>를 찍고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나를 지루해하는구나, 내가 십분 이상 화면에 나오는 걸 못 보는구나, 이런 정적인 연기를 안 좋아하는구나. 물론 내가 미숙한 탓도 있었지만, 미숙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조차 그렇더라. 진지한 정극 스타일을 오래 가지고 가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코미디를 진짜 많이 봤다. 개그 프로그램도 다 챙겨 보고. 어떤 포인트에서 사람들이 웃는지 연구했다. 일단 코미디에선 반복이 중요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도 그런 개그 코드가 있다. 그리고 난 억지로 웃기는 연기는 한 적이 없다. 어이없는 상황에서 터지는 웃음, 어이없는 코미디를 좋아한다.

-연기의 재미를 알려준 작품은 뭔가. =재미는 <환상의 커플>을 통해 느꼈고, 완벽하게 연기의 재미를 알게 된 건 <내조의 여왕>을 하면서다. <내조의 여왕> 할 땐 내가 진짜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았다. 대본도 너무 잘 외워지고, 내가 조금만 뭘 해도 사람들이 미친 듯이 웃고. 그런데 그 시기가 지나고 <추노>를 하면서 연기가 다시 어려워졌다. 그다음 <7광구> 찍을 땐 영화 연기가 또 너무 어렵고. 지금은 신인처럼, 한 5년차쯤 된 신인처럼 연기하고 있는 것 같다.

-<환상의 커플> <내조의 여왕>에서 보여준 빈틈 많은 남자 캐릭터로 오지호라는 배우가 좀더 친근해진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멋있는 캐릭터에 대한 욕심이 있을 것 같다. =아니다. 멋있는 건 <추노>에서 다 했다. 그런데 멋있다는 게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 어떤 모습을 보고 대중이 멋있다고 하는지를 모르겠다. 예를 들어 내가 <도둑들>에서 김수현이 연기한 역할을 맡았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게 멋있을까? 오지호가 하기엔 부족하다는 거지. 관객에게 뭔가 더 줘야 한다는 거다. 중요한 건, 내가 멋있어 보일 때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때였던 것 같다.

-여전히 어렵고 도전하기 버거운 장르가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멋있는 게 제일 어렵다. 이병헌 선배처럼. 이병헌 선배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할까 싶다. 옆 세트에서 이병헌 선배가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찍고 계셨다. 그때 잠시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사극은 처음인데 너무 힘들다고 하시더라. 그런데 그 말이, 그만큼 힘들 정도로 연기를 했다는 거잖나. 난 그렇게 들리는 거다. 이번엔 또 어떻게 연기를 하셨기에…. 어휴, 우리랑 너무 다른 존재다.

-사람들은 잘생긴 배우일수록 연기력을 엄격하게 검증하려 하는 것 같다. =부담스럽다. 주진모 선배, 장동건 선배 등 이른바 조각미남 계열 배우들은 연기를 진짜 잘해야 좋은 소리를 듣는다. 신들린 연기를 해야 하는 거지. 사실 원빈씨가 <아저씨>에서 보여준 것처럼 나도 하고 싶다. 할 수 있겠지 뭐, 오래 연기하다 보면. (웃음)

-메디컬드라마 <제3병원> 촬영을 최근 마쳤다. 천재 한의사 역이라고. =대사 NG를 잘 안 내는데 이번엔 진짜 많이 냈다. 한의사들이 쓰는 말은 다 <동의보감>에 있는 것들이다. 처음 들어보는 약초 이름도 많다. 그런데 또 대사는 길고.

-예전 어느 인터뷰에서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스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스타가 되는 건 실패했다. (웃음) 그땐 왜 그런 말을 했냐면, 스타가 되고 난 다음에 연기를 하면 더 인정받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계속 드라마를 했던 거고. 인지도를 쌓기 위해. 지금은 스타라는 말이 주는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나서 배우가 되어가는 길 위에 있는 것 같다. 이젠 영화에서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연기 경력 15년인데, 아직도 길 지나다니면 ‘잘생겼어요’ 그런 얘기 듣는다. 나도 이제 서른일곱인데. (웃음) <7광구> 때 강렬하게 패했으니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다시 강렬하게 만회하고, 그다음엔 진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걸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