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선 작가의 KBS 새 미니시리즈 <난폭한 로맨스>에 이상한 사무실이 등장했다. 상호명만 봐선 짐작하기 어렵지만 ‘케빈장의 오두막’은 여주인공 유은재(이시영)가 일하는 사설 경호업체 이름이다.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엔 오두막 마크가 그려진 큼지막한 깃발과 대표 케빈 장의 사진액자가 걸려 있고 도로쪽을 향해 있는 작은 유리창엔 사무실 이름을 선팅해놓은 게 얼핏 보인다. 오래된 저층 건물의 유리창 선팅을 구경하다보면 전당포나 대부업체, 기원과 철학관들 사이 ‘평생 늙지 않는 연구소’나 ‘축지법과 비행술’처럼 뭔가 알 수 없는 이름의 간판이 한두개씩 있게 마련이다. 낡고 촌스러운 간판을 품은 오래된 건물은 인근 상권의 풍경과 함께 머릿속에 깊게 남는다. ‘케빈장의 오두막’도 서울 안 적당한 동네를 물색해 건물의 외경을 담는 컷이 있다면 아마 저 엉뚱한 이름의 사무실이 위치한 동네의 분위기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괜한 욕심이 생기는 건 아마 박 작가의 2007년작 <얼렁뚱땅 흥신소> 때문일 거다. 청진동 해장국 골목의 낡은 빌딩에서 만화방, 태권도 학원, 타로카페를 운영하던 영세한 자영업자들. <얼렁뚱땅 흥신소>는 이들이 망해버린 흥신소의 빈 사무실에서 자장면을 먹다 얼결에 일을 떠맡게 되는 내용인데 종로의 후미진 골목을 훑는 로케 신이며 저층 옥상에서 바라보는 빌딩들의 풍경을 기가 막히게 살리는 함영훈 PD의 연출을 만나 정말 청진동에 사는 사람들 같은 생동감을 얻었다.
생각해보면 많은 드라마가 서울을 배경으로 만들어지지만 극 속의 주인공들이 살고 활동하는 지역이나 그들의 동선과 공간감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드라마 속 대개의 사건은 집이나 일터, 데이트 장소에서 벌어지지만 그 사이를 잇는 동선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몇몇 세트를 공간이동하듯 현실감이 뚝 떨어진다. ‘집 세트-지하주차장-도로에서 급한 전화-일터의 주차장-사무실 세트-엘리베이터-카페’를 반복하는 드라마와 골목이나 도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세트들 사이에 공간감과 물리적 거리를 계산하는 드라마는 공감의 깊이나 정서적 울림이 다르다. 최근 드라마 중에는 김도우 작가, 고동선 연출의 MBC <나도, 꽃>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전작 <메리대구 공방전>에서 북촌 한옥마을의 긴 골목을 세로로 두고 전방과 후방의 공간감을 살린 코미디를 하던 고동선 PD의 드라마 속 골목은 여느 드라마보다 웃기고 때로 애틋하다. 김윤철 연출의 2007년 드라마 MBC <케세라세라>는 인사동 낙원빌딩에 사는 주인공들을 건물 바로 옆 도로의 부옇게 김이 올라오는 해장국집 골목을 걷게 하거나, 여기저기 젖은 땅에 분리수거봉투가 놓여 있는 종로의 새벽 풍경을 훑는다. 드라마에서 해장국 냄새며 취객이 빠져나간 종로통의 새벽공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물론 <난폭한 로맨스>는 <얼렁뚱땅 흥신소>와 줄거리가 다르다. 야구팀 블루 시걸즈의 열성팬인 여주인공이 라이벌 팀의 악명 높은 선수를 경호하면서 티격태격 다투는 이야기가 주된 골자라 비시즌의 야구선수가 움직이는 동선이 더 중요하지만, 그래도 박연선 작가는 경호원 은재가 사는 동네의 이름을 여러 번 불러내더라. 은재는 공릉동에 살고 허름한 터틀넥 스웨터에 모직 월남치마 차림으로 공릉 노래방에서 노래를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여기가 공릉동입니다, 할 만한 장면은 볼 수 없다. 오래된 아파트 사이 더 오래된 주택과 상가 건물들이 군데군데 아직 남아 있는, 은재가 사는 동네. TV 화면으로 만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