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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춤과 노래가 없어도 미적 우아함이 압도적인 <청원>
강병진 2011-11-02

한때 추앙받는 마술사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튼(리틱 로샨)은 14년째 병상에 누워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상처를 가린 채 남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뿐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인도 전역의 전신마비 환자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영웅으로 살던 어느 날, 이튼은 현재의 삶이 곧 상처를 잊으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그의 삶은 사실상 관 속의 삶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이튼은 인도 정부에 안락사를 청원한다. 하지만 그를 통해 희망을 얻던 수많은 사람들, 친구들, 그리고 14년간 모든 걸 포기하고 이튼의 곁을 지켰던 소피아(아이쉬와라 라이)는 슬픔과 분노에 젖는다.

<청원>을 연출한 산자이 릴라 반살리는 <블랙>의 그 감독이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모두 안고 태어난 <블랙>의 미셸과 전신마비인 이튼의 운명은 상당히 닮아 보인다. 하지만 <블랙>이 미셸과 그에게 빛을 찾아준 사하이 선생과의 굳센 관계에서 찾아낸 감동을 폭발시키는 영화였다면 <청원>은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자신의 존엄을 찾아가는 과정을 하나의 영웅담으로 그리고 있다. 이튼의 안락사는 곧 그에게서 희망을 얻었던 사람들의 죽음이다. 라디오와 전화, 피켓 시위를 통해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서도 이튼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청원>의 감동 또한 <블랙>처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의 안락사를 찬성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심정, 그리고 그를 14년간 남몰래 사랑하면서 간호했던 소피아의 슬픔은 ‘안락사’라는 사회적 소재를 멜로드라마의 갈등으로 연결시킨다.

무엇보다 <청원>은 범상치 않은 미적 감각과 우아함으로 압도하는 영화다. 주인공 이튼이 마술쇼를 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과 소피아가 이튼을 위로하려 춤추는 장면이 선사하는 고혹적인 매력이 그중 백미다. 인도영화지만 기존의 발리우드영화만큼 화려한 춤과 노래가 없다는 건 인도영화 팬들에게 아쉬운 부분일 듯. 2시간 남짓인 상영시간과 영어를 쓰는 인물들,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의 모습을 간직한 인도의 고아를 로케이션 지역으로 설정하는 등 <청원>은 기존의 발리우드 색깔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인도에서 댄스의 화신으로 불리는 배우 리틱 로샨이 전신마비 환자로 등장한다는 설정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삶과 죽음, 행복과 슬픔, 사랑과 이별의 감정에 대한 영화의 묘사는 형형색색의 세트와 눈을 즐겁게 해주는 춤이 없이도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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