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가든>의 망령이 TV를 배회하고 있다. 조잡한 스팽글 트레이닝복이 대표하는 게으른 패러디들. 원빈이 윗몸일으키기를 하며 현빈 흉내를 내는가 하면 드라마 속 커플이던 현빈과 하지원은 경쟁사 맥주광고에서 다른 상대와 맥주를 마신다. <시크릿 가든>의 유산 중 가장 신물나는 건 O.S.T였다. TV는 물론이고 술집이나 마트에 가도 들러붙는 <그 남자> <그 여자> 때문에 입에서 절로 “빌어먹을!”이 튀어나올 즈음- KBS <개그콘서트>의 새 코너 ‘감수성’에서 쓰이던 어떤 곡의 인트로가 귀를 사로잡았다. 이 음악 익숙한데…그 곡의 출처를 찾다가 닿은 곳은 어이없게도 그렇게 진저리치던 <시크릿 가든> O.S.T였다. 드라마 안팎으로 수십번은 족히 들었던 곡이건만 이제는 영락없이 <개콘> ‘감수성’만 떠오르게 되었네.
평양성, 남한산성 등이 함락되고 남은 마지막 성인 감수성. 몰락의 기운이 감도는 전장에 델리케이트하고 뒤끝 살벌한 장수들이 모였다. 서로의 무신경한 말에 마음이 다치는 순간, 어김없이 흐르는 그 음악은 제목도 <상처만>이란다. 그들이 상처받는 순간은 이렇다. 전장에서 퇴각을 말하는 장수와 내시에게 왕 김준호가 “삼대를 멸할 것이야!” 호통을 치면, 당신 이럴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장수가 답한다. “그게 사람한테 할 소리예요? 내 결혼식 주례도 봤잖아. 저는 그렇다고 쳐요. 얘 내시는요?” 웅성웅성 공감하며 편을 드는 주위 군사들. 내시, 입술을 깨문다.
왕이 혼자만 살길을 도모할 수 없다며 부하가 올린 주먹밥을 내치다가 의도와 다르게 밥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예의 그 음악이 깔린다. “이거… 우리 엄마가 만든 건데.” 옆에서 누군가 거든다. “딱 봐도 엄마가 만들었네. 파는 건 이런 모양 안 나와요.”
불난 데 부채질,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형국이다. ‘감수성’은 회사, 그것도 망해가는 회사를 닮았다. 벼랑 끝 위기감이 사원들을 단결시켜 회생의 길로 이끄는 감동적인 팀워크는 알다시피 사장님 머릿속에만 있는 그림이고, 일이 계획대로 되어가지 않을 때일수록 모두의 심경은 예민해지고 감정문제가 일의 발목을 잡는 일이 잦아진다. 견고한 조직에서 트러블이 발생하면 구성원 중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묵인하게 되지만, 망해가는 가운데서는 모두가 ‘네가 심했네’, ‘말이라도 그렇게 하는게 아니네’ 등 입바른 소리를 보태며 그 자리에서 피해자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과 감정적으로 연대하는 재미난 광경이 펼쳐진다. 손익을 계산하고 발을 뺄 타이밍을 노리는 즈음에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며 굳이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들. ‘감수성’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타고 배신자나 첩자도 슬쩍 끼어들어 무대 가운데서, 제일 크게 억울해한다. 어차피 사약을 받고 죽을 마당에 뺨을 맞은 일로 토라져서 이런 기분으로는 사약 못 먹는다고, 집에 간다고 앙탈 부리는 오랑캐를 연기하는 이는 세뇨리타와 아름이 등 ‘수염 여장’으로 이름난 개그맨 김지호다. 애초부터 배신자면서, 첩자면서, 오랑캐 주제에 제일 서러운 눈을 하고 있더라.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에는 후진하는 트럭이,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김병만의 ‘달인’이 떠오르고야 마는 개그 친화적 감수성에는 BOIS의 <상처만>에 싱크되던 주원과 라임의 애달픈 사랑 따위는 간데없다. 그저, 눈물이 쏟아지기 전 코끝이 매운 표정으로 빈정 상해 돌아서는 오랑캐 김지호의 모습이 남아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