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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합시다
2002-01-03

편집장

“나는 남자들과 술 마시는 것보다 여자들과 수다 떠는 게 더 좋다.”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남자를 최근에 두번 봤다. 한 사람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제작한 오기민씨다. 이 사람은 여성의 성장에 관한 영화를 연달아 세편 만들었으며, 집에 예쁜 운동화를 서른 켤레쯤 갖고 있는 특이한 남자다. 또 한 사람은 이번호에 길게 소개된 작가 김영하씨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필자이기도 했던 김영하씨는 남성적인 것과 축구와 정치와 도박을 싫어하며 쇼핑이 취미라고 태연하게 말했다(그래서 그걸 제목으로 뽑았다). 그리고, 공언한 적은 없지만, <씨네21> 기자였으며 지금은 조우필름 대표인 조종국씨도 그렇다.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데, 밤새도록 수다 떨 수 있는 드문 남자다. 따지고보면 영화판엔 그런 사람들이 매우 많다.

솔직히, 나는 이런 사람들이 반갑다(축구와 도박에 대한 의견은 좀 다르지만). 나를 포함한 남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해온 말 가운데 하나가 쩨쩨하다, 계집애 같다, 같은 형용사였다. 적어도 내겐 잔인하다, 난폭하다, 뻔뻔스럽다 같은 욕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렇게 자랐다. 이상한 일은 내가 가깝게 느끼거나 좋아하는 남자들은, 통용되는 의미에서, 계집애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여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난 그들의 소심함이 좋다. 시트콤 <프렌즈>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챈들러인데, 그의 대사 가운데 가장 감명 깊었던 건 “난 세상에서 제일 소심한 놈이야”(I’m the smallest person in the world)였다. 그 과감한, 떳떳한 소심함이 좋다.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아는 사람들에 한정해서 거칠게 말한다면, 80년대 세대 가운데 대범한 사람들은 정치판으로 갔고 소심한 사람들은 문화판, 특히 영화판으로 왔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 르네상스에는 주도자들의 소심함도 한몫 했다는 생각까지 든다. 소심한 사람들은 작은 거짓말은 해도 큰 거짓말은 못한다. 무엇보다, 내가 아는 소심한 사람들은 모두 합리주의자이며 페어 플레이어들이다. 그들은 비합리적인 세상의 도래를 무서워하고 있으며, 언페어 플레이가 다른 소심한 사람들한테 미칠 상처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고 그걸 피하려 한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어떤 분야보다 페어한 곳이 영화판이 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문성근씨가 “정치판이 영화판만큼 됐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 난 속으로 깊이 동의했다.

나는 우리가 좀더 소심해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린 대범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입으며 살았다. 2002년은 소심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여자 같은 남자들이 훨씬 많아지길(특히 정치판에서) 진심으로 빈다.

좌우지간, 독자 여러분, 새해엔 몸도 마음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