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급 공무원인 필용(박중훈)은 ‘전망있는’ 한지과에 배치된다. 시장이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 100억원 예산의 <조선왕조실록> 복본 사업을 맡게 되면서 그는 승진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기대만큼 일이 순탄하지는 않다.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예산은 고작해야 2억5천만원. 전통적인 외발뜨기 방식의 복본 사업인지라 한지업자들의 반응 또한 냉랭하다. 게다가 한지 제작 과정을 찍고 싶어 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의 촬영 섭외 일까지 맡게 되면서 필용의 짜증은 점점 늘어간다. 한편 뇌경색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필용의 아내 효경(예지원)은 필용과 지원과의 관계를 의심한다.
“명품 좋아하시네. 이젠 (명품) 못 만들어." 오랫동안 옛 방식으로 한지를 만들어온 덕순은 공무원들 앞에서 세상이 오염됐고 사람이 오염됐는데 세상을 뛰어넘는 명품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따져묻는다. 이는 임권택 감독의 오랜 화두이자, 그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서도 계속되는 문제의식이다. 불순한 세상에서 어떻게 고운 달빛을 건져올릴 수 있을까. 한데,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초인적인 의지로 세상과 불화하는 장인은 <달빛 길어올리기>에선 찾아볼 수 없다. ‘천년 가는 종이’ 때문에 한데 모인 그들 중 때묻지 않은 이가 있던가. 한때 ‘천년 가는 종이’를 만들었다는 마을 월곡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수몰되어버렸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완성된 태(態)로 딜레마를 섣불리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제시하는 건 향(向)이다. 이어도에 갈 수 없다 해서 이어도를 바라볼 수 없는 건 아니다. 달을 자꾸만 바라보면서, 필용은 조금씩 정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