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아트가 난해한 예술작품이란 말은 틀렸다. 일본 아티스트 다카기 마사카쓰의 작품은 극영화만큼 이야기가 풍부하고, 애니메이션만큼 환상적인 영상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영상에 맞춤옷처럼 감겨드는 그의 피아노 연주는 수많은 미디어 아트 작품들이 놓치거나 등한시했던 감수성을 간질인다. 누구보다 눈과 귀가 예민할 뮤지션들(이를테면 데이비드 실비앙이나 UA 등)이 앞다투어 다카기에게 뮤직비디오를 맡기거나 라이브 퍼포먼스를 요청하는 것을 보면, 다카기의 미디어 아트가 그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도 얼마나 대중예술에 근접해 있는지를 체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한국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영상 작품 상영과 더불어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메네> 투어로 서울을 찾은 다카기 마사카쓰가 3월4∼5일 백암아트홀에서 공연을 열었다. 유화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화면, 그 화면을 장악한 다채로운 색의 향연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공연에 넋을 빼앗긴 다음날, 봄처럼 수줍게 웃던 서른세살 아티스트를 만났다(공연을 놓친 이라면 3월8일부터 20일까지 삼청동 aA디자인뮤지엄에서 열리는 그의 전시를 추천한다).
-어제(3월5일) 공연 중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말을 했는데. =공연장에 따라서 피아노 상태가 많이 다르다. 요즘 한국 기후가 건조해서 그런지 피아노도 잠들어버린 듯했다. 건반이 무거웠고, 그 부분이 다소 힘들었다.
-<이메네> 투어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영상 작업을 해온 지 10년쯤 된다. <이메네>의 이전 작품인 <Tai Rei Tei Rio>나 <NIHITI>를 통해 만들고 싶던 작품을 어느 정도 마무리지었다고 생각했다. 영상 작업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번엔 평범한 작품이 아니라 내가 죽은 뒤에도 남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마치 ‘유서’처럼. 그리고 ‘꿈의 근원’(이메네)을 컨셉으로 잡았다. 이번 투어에 상영되는 영상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기억들, 혹은 나의 근원은 무엇인지 세상의 근원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작품들이다. 어제가 여덟 번째 공연이었는데, 공연 중에도 내 정신세계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혼을 찾으려는 시도를 늘 한다.
-연주를 하며 읊조리는 말은 일본어인가. =내 연주에는 가사가 없다. 그러므로 일본어가 아니라 ‘소리’를 내는 거다. 산에서 ‘야호’ 하고 소리치면 메아리가 돌아올 때도 있고,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고, 아예 다른 소리가 돌아올 때도 있잖나. 나는 소리의 그런 변화무쌍함을 즐겨 곡에 가사를 붙이지 않는다. 공연날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소리를 내는데, 어제 공연에서는 뱃속의 태아를 생각하며 소리를 냈다.
-언제부터 영상 작업을 시작했나. =대학에서 취미로 사진을 찍으며 사진 촬영에 관심이 생겼다. 재학 중에 잡지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는데, 이 잡지가 라디오 방송에서 상을 받으면서 사진과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현재 클럽신에서 활동 중인 아티스트 아오키 다카마사와 함께 ‘실리콤’이란 그룹을 결성했다. 그가 음악을 만들고 내가 영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함께 2년간 작업하다가 2001년에 좀더 넓은 범위에서 활동하자는 생각에 음악과 영상 모두를 내가 직접 만들게 됐다.
-영상 작품을 상영하며 피아노 연주를 하는 이유는 뭔가. =내게 음악은 일종의 표식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 영상 작품을 보았을 때, 과거의 특별한 감정들이 생각난다면 그건 영상에 덧붙인 음악 때문일 거다. 그렇게 표시를 해둔다는 느낌으로 작품에 음악을 붙인다.
-당신의 작품은 소재부터 정서까지 무척 회화적이다. 굳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작품 활동을 하는 이유는 뭔가. =실제로 2005~2007년 사이에는 회화 도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회화는 역시 한번 그리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고, 작품을 완성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려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면 새로운 시도들을 이른 시간 내에 할 수 있다. 그래서 선택했다.
-여행에서 주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고 들었다. <이메네>는 어떤 장소의 풍경들을 반영했나. =미국, 스위스, 인도네시아, 네팔, 일본, 파키스탄, 모로코의 풍경이 담겨 있다. 한번 여행을 떠나면 최소 3주에서 한달 정도는 그 장소에 머물러 있다. 하루에 60분짜리 테이프 하나 분량을 찍으니 한달 여행을 다녀오면 촬영 테이프가 30개나 된다. 이 영상에서 색을 뽑아내거나 형태와 움직임에 변화를 주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나간다.
-일본영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때에 그를 부탁해, 토에이>(2007)의 음악 일부와 <소울 레드-마츠다 유사쿠>(2009)에 삽입된 영상과 음악을 맡았었다. 개인적으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의 영화는 자연현상과 등장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무척 뛰어나다. 구체적으로 내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없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부분이 내 작품에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것 같다. <이메네>에 등장하는, 어린아이가 떠오르는 장면처럼.
-미디어 아티스트, 뮤지션 등 당신을 설명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나. =영상과 음악을 함께 만들고 있기 때문에 미디어 아티스트와 뮤지션이라는 말은 좋다. 하지만 아직 도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굉장히 다양한 일들을 이뤄내 더 이상 직업에 대한 설명이 필요없는 순간이 온다면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