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818만명. 올해 <친구>가 만들어낸 흥행성적은 단순한 수치를 떠나 하나의 사회현상이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같은 영화 속 대사들은 유행어가 되어 방송과 지면을 덮었고, 각종 패러디가 이어졌으며, 부산은 TV드라마, 뮤직비디오, CF의 주요 무대로 선택되기도 했다. 하지만 <억수탕> <닥터K>로 이어졌던 고전(苦戰)을 <친구> 한편으로 완전히 엎어버린 곽경택 감독은 이른바 ‘성공’의 기쁨에 취해 있을 법도 한데 이 웅성거림이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다음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강원도로 들어갔다.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곽 감독의 신작 <챔피언>은 지난 8월 가진 제작발표회에서조차 링 위에서 생을 마감한 권투선수 김득구의 이야기란 것과 유오성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제외한 어떤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언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뭐, 변할 게 있겠습니까?” 내년 3월 일본 개봉을 앞둔 <친구> 때문에 부산에 잠시 다녀왔다면서 운동화에 큰 배낭을 짊어지고 나타난 곽 감독은 “<친구> 전이나 뒤나, 내는 변한 게 하나도 없십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4개월 만에 입을 연 그에게선 전작의 후광을 업은 흥행감독의 자만심이 아니라, 품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루빨리 보여주고 싶어하는 천상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신감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풍겨나왔다.
<친구> 개봉 뒤 어떻게 지냈나. <챔피언> 제작발표회를 한 것도 벌써 4개월이 지났다.
개봉 뒤 2개월간은 그야말로 홍보 및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하는라 정신없이 지나갔다. <친구> 편집 시작하면서 당시 연출부 세컨드에게 <챔피언> 자료조사를 부탁했는데 뒷마무리를 하고 나서 보니까 정말 엄청난 양의 자료를 모았더라. 자료분석만 한달이 걸렸다. 이후 취재대상 취재도 해야 했고, 알다시피 강원도 들어가서 쭉 시나리오 작업만 했다. 대신 집안모임, 친구모임 같은 주변 행사는 안 챙길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러려니 했다 해도 지금은 주변사람 안 챙기면 “경택이 변했네”, 이런 식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니까.
부인이나 아이들이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 건 없나.
눈빛? 별다른 거 있겠나. 그냥 예전보다 더 믿어주고 안정되었다는걸 제외하면…. 아, 며칠 전 아침에 아내가 계란프라이를 해줬는데 노른자 색깔이 유난히 노랗고 진해서 “이거, 와 이리 찐하노?” 물어봤더니 몇천원 더 주고 비싼 계란을 샀다고 하더라. 그 정도다. 새로운 반찬이 나오는 건 아니고 원래 나오던 게 조금 업그레이드된 정도. (웃음) 아이들은 아빠가 바빠져서 얼굴 보기 힘드니까 오히려 더 싫어한다.
<챔피언>과 함께 영화사 진인사필름을 차렸다.
<친구> 함께했던 조원장 프로듀서를 포함해 <친구>에서 토종 사투리를 쓰는 영어 선생으로 나온 친구 양준경 등이 함께 일한다. 내가 <닥터K> 끝나고 가장 어려웠을 때 양준경은 IMF 맞아 10년 다니던 직장을 관뒀다. 둘이서 ‘생계형 창업자금’ 3천만원으로 7평짜리 초라한 사무실에서 시작했던 것이 ‘다큐피플’이다. 누가 물건 팔러 들어왔다가 우리 신세한탄만 듣고 나갈 정도로 힘들던 시절이었다. 진인사는 다큐피플에서 이름만 바뀐 거고. 사실 감독으로 별로 달라진 건 없다. 회사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잘 모르고, 알 필요도 없고 가급적 모르려고 한다. 대신 책임져야 할 일은 많이 늘었다. 프로젝트 개발은 조 PD가 알아서 하는 편이고 나는 아이템 개발하고, 시나리오 모니터링 하는 정도다. 하나 좋은 것은, 집기 제대로 갖춰진 번듯한 사무실에 앉아 있는 직원들 보면 흐뭇하다.
시나리오 쓸 때마다 머리를 깎는다고 들었다. 이번 <챔피언> 시나리오 쓸 때도 강원도에 삭발하고 들어가기도 했고.
일단 머리가 없으면 내가 불편하다. 머리 빡빡 밀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부담스러우니까 사람도 안 만나게 되고 이런저런 요청들도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는 명분도 생긴다. 시나리오 쓴다는 게 그렇게 주변정리를 하고 철저하게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다.
왜 ‘김득구’였나.
늘 시놉시스나 트리트먼트를 쓰기 전에 기획의도와 제작의도를 글로 써본다. 기획의도는 상업영화감독이니까 상업적으로 이 영화가 어떤 메리트가 있는가 하는 것이고, 제작의도는 왜 이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지, 내 스스로 납득이 되는지를 체크하는 거다. 이런 말 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득구를 영화화한다는 것은 내가 선택했다기보다 오히려 선택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징조’라고 해야 하나? 묘한 기운도 여러 번 느꼈다. 왜 교회 나가는 사람들 말대로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랄까. <챔피언>을 하라고 <친구>를 흥행시켜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김득구를 기억하는 가장 강한 이미지는 무엇인가.
17살 때 친구집에 놀러가서 친구 아버지와 함께 김득구 선수의 마지막 경기를 보게 되었다. 원래 권투를 좋아하긴 했지만 보통 경기라는 게 테크닉도 있고 작전도 있고, 치고 박는 타임이 있으면 빠져주는 타임도 있어야 하는데, 이건 달랐다. 어떻게 싸워도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그건 권투경기라기보다 처절한 투쟁처럼 보였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싸웠는데 지고 나니까 정말 속상했다. 다음날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뉴스를 들었고 연이어 임신상태의 약혼녀 이야기가 나왔다. ‘챔프의 아들 잉태되다’, 뭐 이런 헤드라인이었던 것 같은데 언론이 참 잔인했다. 그냥 놔뒀으면 될 여자를 굳이 끄집어내서 유복자를 낳으라고 독려하는 게 아닌가. 저 여자는 새출발 해야 한다, 아이 낳으면 안 된다. 혼자 생각했는데 결국 ‘아들을 낳으면 챔프로 키우고 싶어요’ 같은 뉴스가 이어지더라.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며칠에 걸쳐 연타로 맞았던 기억은 특별했다. 늘 내 머릿속에 그가 있었고 언젠가 김득구를 영화화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그런 기억만으로 영화를 하겠다고 하진 않았을 텐데.
미국 유학을 마치고 95년 귀국했는데 한국이 갑자기 잘사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 당연히 자가용이 있었고, 씀씀이도 컸다. 미국보다 생활이 풍족한 느낌이었다. 이상했다. 갑자기 우리가 부자가 된 것도 아닐 텐데….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IMF를 맞더라. 한때 ‘헝그리정신’이 미덕이었던 때가 있었지 않나. 지금 그런 이야기는 촌스러운 이야기고 전혀 미덕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덕을 본다는 것을, 그 시절을 살았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물론 계몽영화를 찍겠다는 건 전혀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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