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다음 바로 들어가는 작품이라 부담이 많이 되지 않나. 비교하려는 시선도 많을 테고.
조심스러웠던 부분이다. 2고까지 썼다가 다 뒤집고 새로 시나리오를 쓴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난 재미있다고 썼는데, 저거 <친구>에서 써먹었던거 또 써먹었네, 하면 끝장이라는 거지. 하지만 나도 모르게 녹아들어간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까 냉정하게 들어갔다. 결국 <친구>의 코드들을 바꾸든지, 빼버려야 했다. 가령 <친구>가 빨간색이라면 <챔피언>은 파란색이다. <친구>는 관객이 가장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연대기적 구성이었다면 <챔피언>은 전혀 그렇지 않다. 멘시니와의 경기가 82년이었고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김득구가 복서로 커나가고 약혼녀를 만나고 경기에 이르기까지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
실존 인물을 영화화하는 것은 완전한 창작이 아니라서, 쉬운 점과 어려운 점이 따로 있겠다.
<친구>는 나는 알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챔피언>은 누가 마음만 먹으면 나만큼 취재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다 알려진 이야기만 하면 누가 영화를 보러 오겠는가. 결국 남들이 못 해내는 것을 해내야 했고 그러다보니 김득구가 마지막 매치를 앞두고 관을 짜서 미국에 갔던 이야기 등, 다 아는 에피소드들은 시나리오상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어느 정도 사실에 충실했나.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였고 이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일 답답했다. 직접 그분의 삶의 순간순간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픽션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친구>는 내가 아는 몇개의 에피소드들을 배열해놓고 그 간극을 메우고 연결하면 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챔피언>은 내가 조사한 모든 자료를 한데 모아놓고 가루를 낸 다음 반죽을 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덩이로 떼어낸 것 같은 모양새다. 얼마만큼 픽션이고 그렇지 않은가를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모든 것이 믿음이다. 그의 삶에 내가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갔나 하는. 하늘나라에서 그분을 만났을 때 “이 새끼, 와 있지도 않은 일을 썼노”라고 욕먹지 않을 정도라고 자신한다.
시나리오 작업중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친구>는 솔직히 내 기억을 따라가면 되는 작업이었다. 구체적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모든 것이 이미 캐릭터화해 있었다. 하지만 <챔피언>은 막막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가령,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말투를 썼을까, 하는 건 도저히 사진이나 취재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진짜 이 죽음을 슬퍼하고 괴로워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언론의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이야기가 나올 사람들은 모두 두문불출하고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거의 시나리오 마지막 작업단계쯤에 극적으로 김득구와 가장 가까왔던 친구의 소재를 알게 되었다. 한국에 계신 분이 아니라서 직접 외국으로 날아가 만나고 왔다. 그분 말씀이 ‘득구가 살아서 걸어오는 줄 알았다’고 하시더라. 왜 아까 선택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신기하게도 김득구의 성격이나 걸음걸이, 말투가 나와 정말 많이 닮았다고 하셨다. 그분을 만난 뒤에 비로소 영웅이나 비영웅으로서의 김득구가 아니라 인간 김득구의 초상이 그려질 수 있었다.
김득구의 실제 부인과 아들에 대한 관심이 집중될 듯하다.
철저히 보호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 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내 입으로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갈 일은 없을 거다.
김득구와 마지막 경기를 치렀던 멘시니에 대한 입장은 어떤가. 살아 있는 사람이고 여전히 자녀들은 ‘살인복서의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다닌다고 들었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고 조감독과 프로듀서가 미국 헌팅 때 직접 보고 허락을 받아왔다. 일전에 에서 멘시니에 대한 특별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본인에게는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았던 데 비해, 이렇게 직접 와주니 고맙다고 했다. 그 시합 이후 본인의 고통도 컸기 때문에 촬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뭐하지만 좋은 영화 나오길 기대한다는 말과 함께 ‘KT(경택) Good Luck!’이 적힌 쪽지도 함께 전했다. 얼마 전엔 우리 영화에서 멘시니 역을 맡은 배우가 트레이닝중인 LA연습장으로 가까운 친구를 보내서 격려했다고 들었다.
<친구>나 <억수탕>에선 곽 감독 특유의 유머가 좋았다. <챔피언>에서도 그런 웃음을 기대할 수 있을지.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른 사람의 이야기라 유머의 배분이 쉽지 않을 텐데.
한번은 만화가 허영만 선생께 시나리오를 드리고 봐달라고 했다. 워낙 권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기도 하고 평생 드라마와 싸워온 사람이니, 아이디어가 있으면 주십시오, 했는데 심각할 줄 알았는데 기분좋고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시더라. 그리고 ‘기똥차게’ 좋은 아이디어를 몇개 주셨는데 그대로 써먹었다. 무슨 내용이냐고? 미리 이야기하면 재미없다. (웃음)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비운’을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건 타이틀을 거머쥐어서 ‘챔피언’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서 ‘챔피언’인 사람의 이야기다. 만약 내가 불쌍하고 힘들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조망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그건 건방진 거다. 눈높이를 맞추고 바라보면 그곳에 희망과 유머와 삶의 밝은 부분을 볼 수 있다. 영화가 120분이라면, 100분 동안 실컷 웃다보니 내가 울고 있더라, 식이 될 거다. 또한 지금 프로야구처럼 국민스포츠였던 복싱중계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재미있는 기억들도 더해진다.
김득구 역으로 유오성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나. 캐스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그간 시나리오를 몇개 써보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이 초반의 아이디어만 가지고 끝도 없이 영화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챔피언>은 마지막 신이 분명하게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친구> 만들 때부터 술먹고 가끔 이야기하긴 했지만 확정을 짓진 않았었다. 어느날 사무실에서 오성이에게 그 마지막 신을 이야기해주는 도중 나도 모르게 울어버렸다. 그 이후로 오성이가 이 작품에 확신을 가진 듯하다.
배우 유오성이 가진 힘은 어디에 있나.
딴 생각을 안 한다. 일단 뭐 하나 들어가면 전혀 딴 데 신경을 안 쓰고 집중력도 대단하다. 감독으로서는 그런 게 얼마나 편하고 믿음직한지 모른다. 알아서 준비하는 배우다. <친구>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김득구와 가까워지려고 정말 노력을 많이 했다. 싸구려 권투영화에 보면 권투선수에게 하등 필요없는 근육을 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오성이를 보면 몸을 보나 어딜 봐도 정말 그 시절 김득구 같다.
유오성을 제외한 다른 캐스팅을 꽤나 오랫동안 유보했다.
중요한 조역이 4명쯤 되는데 거의 신인이다. 4차에 걸쳐 까다롭게 오디션을 보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게다가 운동을 해야 하는 역들이라 이 영화를 위해 완전히 시간을 내줄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약혼녀 역의 여자연기자는 <친구>와 달리 분명한 멜로가 살아 있기 있기 때문에 오성이와의 조화도 중요했다. 오디션장에 실제 오성이의 실물크기의 사진을 놓고 옆에 세워보기도 했다.
얼마 전 크랭크인을 했다. 촬영 초반 느낌이 어떤가.
솔직히 말하면, 괭장히 좋다. 영화에 대한 자신감은 스탭들이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영화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는 것을 볼 때 느껴지는 건데, 지금 그런 게 보인다. <친구> 스탭 중 1/3 정도만 바뀌었다. 물론 큰 비중을 차지하는 촬영팀과 조명팀이 바뀌었지만 호흡이 잘 맞는다.
홍경표 촬영감독과는 첫 작업이다. <친구>에서 보여준 실버리텐션 등의 화면효과를 사용할 예정인가.
홍경표 감독은 올해 내가 새로 알게 된 사람들 중 베스트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할 정도다. 처음엔 나랑 잘 맞을까 걱정했던 게 사실이지만 보면 볼수록 장인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 촬영했던 황기석 감독이 가끔 놀러오는데 홍 감독은 황 감독 형 같은 느낌이랄까, 닮은 구석이 있다. <챔피언>은 화면효과보다는 숏 자체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같은 권투영화라고 할지라도 <분노의 주먹>식의 권투가 있고 <록키>의 권투가 다르다. <챔피온>이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경기장면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친구> 같은 흥행을 예상하고 있나.
관객 싫어할 감독이 어디 있겠나. 문제는 <친구>보다 더 밀도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이다. <닥터K> 만들 때 <억수탕> 다시 보면서 ‘우찌, 저리 못 만들었을꼬’ 했는데 <친구>도 지금 보면 부족한 점이 눈에 팍팍 보인다. 싸움도 많이 해본 놈이 잘하지 않나. 내공이 늘었을 거라고 믿는다. 전작들보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소리는 정말 쥐약일 거다. <친구>보다 두배 노력하고 흥행은 절반 정도 결과면 휼륭하다고 생각한다. 더 잘되면 좋은 거고.
2001년은 곽 감독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한해일 듯하다.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이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해석해주길 바란다. 권투선수 취재 도중 들은 이야기다. 세계 챔피언을 하고 난 뒤 그 타이틀을 오래 가져가는 사람은 자리관리가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거나 성격이 더러운 애들이라고 하더라. 여기저기 방어전에 끌려다니다 보니 연습할 시간이 없고, 그러다보면 실력이 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 한해가 감독으로 맛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시간이었다면, 내년은 나태해지지 않은 채 감독으로의 내 색깔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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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은하 [email protected]·사진 이혜정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