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면서 어쩌다 사랑을 하지만 개는 평생 오직 사랑을 위해 거기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양떼를 몰거나 밀수품을 수색하는 개도 있으나 오늘날 대다수의 개들은 (변덕스러우나마) 사랑을 주고받으려는 인간의 정서적 필요에 봉사한다. 눈을 떠서 잠들기까지 개들은 함께 사는 인간의 표정과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며 희미한 낌새 하나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매일 아침 난생처음인 양 속없이 사랑에 빠지고, 사랑 때문에 자존을 잃는다. 그들의 유순한 눈동자에 담긴 끝없는 애원과 고백이 모두 인간의 언어로 들려온다면, 우리는 아마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개들을 내칠지도 모른다. 개들의 고단한 숙명은 그들을 길들인 인간의 업보다. 프랑스 저술가 리바롤은 이렇게 썼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을 인간의 범주로 옮겨다놓지는 못하면서 자신의 범주 밖으로 끌어낸 결과가 되는 것이다.”
고양이가 은근한 거리를 둔 우정의 마스코트라면 개는 자아를 팽개친 애정의 표상이다. 고양이가 세계의 표면을 물수제비뜨고 지나가는 예술의 포즈를 가졌다면, 개는 때로는 비굴하게 매달려야 간신히 지탱되는 삶의 얼굴이다. 개는 고양이보다 만만해 보이지만 고양이가 결코 줄 수 없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사랑의 양과 집중력에 있어서 우리가 개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부채감이다. 우리를 먼저 떠나갈 게 확실한 그들의 무조건적-보답할 가망없는-사랑은, 어머니나 할머니의 그것을 닮았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한 회한을 우리에게 새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가 그린 ‘검은 그림’(Black Painting) 연작의 한 작품인 <개>는 천진한 무방비함의 초상이다. 화가는 광대한 배경에 몹시 조그만 개 한 마리를 떨어뜨려놓았다. 창백한 황색 허공과 암갈색 바닥은, 형체와 스케일을 헤아릴 수 없어 더욱 위압적이다. 개의 네 다리를 집어삼킨 어둠은 홍수에 불어난 물 같기도 하고 유사(流砂) 같기도 하다. 사방을 둘러봐도 개를 구해줄 지푸라기 하나 없다. 순종의 표시로 귀를 뒤로 젖힌 개가 주시하는 오른쪽 허공에는 어렴풋한 음영이 어른대는데 상상력을 발동하면 인간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의 눈빛에는 원망도 호소도 없다. 그저 영문을 모른 채 곧 내려질 심판에 한없는 신뢰를 보낼 뿐이다. 그것이 자기를 끝장낼지언정.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우리도 모두 한번쯤은 이 개처럼 연약하고 맹목적이었다. 고야의 <개>는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깊은 우물에 빠져 허덕였던 인생의 연약했던 한철을 상기시킨다. 또한, 신의 뜻과 그 종착점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걷고 있는 이 길의 풍경을 멈추어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