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48)은 배우다. 그리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근심 많고 생각 많고 일 많은 영화 정책가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과 성과를 두루 인정받는 파워맨이다. 요즘 그는 다른 일로 또 바빠졌다. 근심에 빠져있다가, 새로운 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엔 민주당 노무현 고문을 지지하기 위해서다. 영화 하는 사람이 무슨 정치판에까지 관여하려고 하느냐며 빈정대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텐데, 그는 그런 사람이라면 쫓아가서 몇시간이고 마주 앉아 설득할 테세다. 그의 뜻은 한 정치인을 대변하는 데 머무르는 건 아니다. ‘민족화해와 지역통합을 위한 개혁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요즘은 ‘민족사 최대의 위기’ 시점이다. 이번에도 지역통합을 바탕으로 민주화 세력이 결집하지 않으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여파는 이제 중흥기를 맞고 있는 한국영화의 발전에도 깊은 상처를 입힐 지도 모른다. 요즘 문성근은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고서 9월부터 대학 등을 돌며 강연회를 하느라 정치인의 스케줄만큼 빡빡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조만간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한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가질 예정이라는 그를 만났다.
-올해 초에 정말 쉬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그랬었나. (웃음) 심부름을 이젠 그만 했으면 하는 맘은 있었다. 정책이든 NGO든 일을 떠맡게 되면서 본업인 배우로부터 너무 멀어졌으니까…. 근데 한 2년 정도는 더 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영화 역사가 제대로 발전했으면 정책이나 NGO 분야에서 영진위의 김혜준 실장이나 쿼터연대의 양기환 사무처장 같은 일꾼들이 많을 텐데, 아직 빈자리가 많아서. 얼마 전에 CJ와 CGV가 기금을 마련해서 한국영화 산업 및 정책 연구자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한 건 개인적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 사람들이 현장에 나오면 내 할 일이 줄어드는 거니까.
-민주당 노무현 고문을 지지하는 강연회에 다니느라 지방에 내려가는 일도 잦다.
=‘나를 어떻게든 쓰시오’ 하고 의사표명한 건 올해 봄이었다. 그러다 강연회에 나서달라고 몇달 전에 부탁을 받았고, 방송과 영화 촬영 스케줄을 빼면 그쪽에 모두 시간을 쏟고 있다.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계기가 있나.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가깝게는 87년부터지만, 오랜 세월 우리 역사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왔다. 그래서 문민정부든 국민의 정부든 내 손으로 뽑을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유는 자명하다. 민주화추진 세력이 영남과 호남에 기반을 두고 둘로 갈라지면서 스스로 소수정파가 됐기 때문이다. 지금 봐라. 지역구도 아래서 정치가 비상식적으로 가고 있다. 87년에 국민들을 끌어모았던 구호가 직선쟁취였다면, 이제는 지역감정에 근거한 낡은 판을 깰 수 있는 후보가 나서야 한다. 그래야 힘이 결집된다. 노 고문은 더이상 지역감정 때문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는 걸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그래서 적역이라고 판단했다.
-직접 나선게 된 까닭을 좀더 말해달라.
=참혹했던 유신 시절이나 5공 때도 희망은 있었다. 정당성 없는 체제는 무너질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 그런데 요즘은 국민이든 사회단체든 모두들 열패감에 빠져 손을 놓고 있다. 민주정권도 별 소용없구나 하는 한탄이 흘러나오고, 기득권 세력은 예전이 더 좋았다고들 떠든다. 과연 그런가. 지금쯤 우리 더 잘해봅시다 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를 좀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보자는 에너지가 발동한다. 가만있다간 더이상 희망은 없다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손놓고 있는 건 일종의 책임방기다.
정치적인 야심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총선 때면 공천설이 돌기도 했고.대놓고 그러는 사람은 없더라.(웃음) 노 고문과 전당대회까지만 같이 가겠다고 한 건 정치하겠다는 뜻이 없어서다. 그 이후에 활동하려면 정당원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 계획은 없다. 다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인 발언을 하겠다는 것이다. 영진위 부위원장으로 있을 때도 ‘문성근이 국회의원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말이 있긴 했다. 사실 그건 비난할 게 아니다. 나야 뜻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유능하고 바른 누군가가 나선다면 도와줘야 한다. 영화계도 그렇고 각 분야 직능 대표들이 국회에 진출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전엔 몰랐는데 연설하는 걸 보니 격정적인 어조가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닮았더라. 올해는 문호근 선생도 세상을 뜨셨는데 막막하고 외롭지는 않나.
=집안에서 막내이다 보니까 예전엔 큰일은 아버지나 형한테 다 미루고 그랬다. ‘형이 다 해. 난 몰라, 아버지 나 모르겠어’ 하고. 근데 두분 다 가셨으니 부담이 크다. 아버지 이야기를 잠깐 꺼내자면,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쉰아홉살부터 생의 마지막 17년 중 6번을 감옥에 가신 분이다. 그걸 곁에서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나 싶더라. 그런데 최근 평전을 쓰기 위해 1년 넘게 자료조사를 했던 김형수 시인이 답을 줬는데…. 당신이 1960년대부터 준비하던 것이 성경번역 작업을 하시면서, 이미 구약에서 나오는 선지자 같은 삶을 살것이라고 예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 갑시다’ 하고 비전을 제시해놓고 정작 자신은 위정자한테 잡혀서 죽는 그 삶을 받아들이고선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나야 그에 비하면 헌신적으로 뭘 하는 건 아니니까.
-이창동 감독이나 명계남씨 등과도 자주 만나나.
=명계남은 노사모 일로 자주 보는데, 이창동은 거 요즘 무슨 예술한다고 얼굴 보기도 힘들다. 간혹 보게 되더라도 나를 배우로 아는 것 같지 않은데다 완전히 무시한다. (웃음) 그래도 이창동을 보면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난 못 보는 주변상황들, 상대의 감정 등 고려해야 할 것들을 찬찬히 일러준다.
-현 정부가 영상정책의 큰 틀을 짜는 데 주요 조력자 중 한 사람인 것으로 안다. 4년이 지났는데 평가를 한다면.
=정치가 영화계처럼만 굴러간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겠다. (웃음) 그땐 스크린쿼터가 흔들리는 시점이었고, 금융자본 또한 빠져나갈 태세였다. 영진위를 중심으로 투자조합을 활성화시키고, 쿼터연대가 앞장서서 의무상영일수를 지켜내야 했다. 누군가는 영진위가 너무 시장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하겠지만, 그건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다. 시장을 먼저 활성화시키는 것이 돌이켜봐도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영진위 또한 독립단편영화를 비롯해서 저예산영화들의 유통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 내년 중반부터는 그 부분도 조금씩 해소될 것으로 믿는다.
-이제 본업 이야기를 해보자. <질투는 나의 힘>은 어떤가.
=한 신 찍었는데, 정말 연기가 안 된다. 그래서 박찬옥 감독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그 상황에 푹 빠져야 하는데, 머릿속이 논리와 분석으로 가득 차 있으니 될 리가 없다. 10년 전에 <그들도 우리처럼> 찍을 때도 ‘이걸 어떻게 연기해야 하나’ 하는 난감함이 있었지만, 그땐 그래도 여기에 대가리 처박겠다는 게 있었으니까 됐는데…. 이번엔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 내년에 출연하기로 했던 세편도 감독한테 내 사정을 털어놓고서 못하겠다고 이해를 구했다. 약속을 못 지킨 미안함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감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그래서 요즘은 운전을 도와주는 친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강연회 다녀오는 차 안에서라도 좀 자야 현장에서 문제를 풀 수 있을 테니까. 두 가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도리가 아니니.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겠다.
=문화관광부에 가면 싼 할인점이 있는데, 얼마 전까지 거기서 포도주를 박스째 사다 놓고 마시곤 했다. 요즘은 그것도 맘대로 못한다.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날 의사가 전화해서 혈중알코올수치가 다른 사람 10배라고 겁주더라. 한 석달은 조심해야지.
-일이 정리되면 여행이라도 다녀와야 하는 게 아닌가.
=여행을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나한테는 술이 제일 낫다. 할리우드에선 배우한테 정신분석 의사가 따라붙어 성격분석부터 해소까지 같이 간다지만, 우리야 그게 안 되니까. 내 경우에는 술 먹고 만취해서 털어내면 된다. 심부름에서 석방되고 나서 한 두어달 술 마시면 되겠지.
-내년이면 오십줄에 들어서는 것 아닌가. 앞으로 배우말고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
=무슨 소리하나. 그건 명계남에게 해당하는 거고. 난 마흔살 넘은 지 얼마 안 됐다. (웃음) 90년대 초에 촬영현장에 들어와서 작품도 많이 했고, 쿼터 싸움도 해보고, 운이 좋아선지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얼마 전까지 감독을 해보겠다는 맘이 있었는데, 집에 있던 어느날 문득 감독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영상을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고 나니 내가 그런데 소질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연출 공부를 한 것도 아니라서 접었다. 요즘은 학교에서 오라고 하고 주위 사람들이 조근조근 재밌다고 부추기긴 하는데 나랑은 안 맞는 것 같다. 아직은 배우말고는 딱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