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일은, 지긋지긋하게 운이 없어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픈 누군가가 절박한 심정으로 만들어 낸 발명품이라고 굳게 믿는 나지만, 워낙 문구류를 좋아하다보니 새로운 해가 시작되면 자석에 이끌리듯 문방구로 빨려들어가 새 다이어리를 사고야 만다. 문제는 한해가 열두달이나 된다는 것이고(심지어 365일!), 내 끈기는 그리 강하지 못하다는 점인데, 새롭게 품은 마음은,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책꽂이 한구석에는 쓰다 만 노트와 다이어리들이 가득 쌓여 있고 대부분 앞쪽만 빼곡하게 메모가 되어 있다. 쓰다 만 노트야 두고두고 쓸 수 있다지만 날짜가 박힌 다이어리는 한번 타이밍을 놓치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2009년에는 아예 다이어리를 사지도 않았고, 연수군이 추천해준 아이포드 터치의 어플리케이션 ‘데일리 트래커’에다 모든 영화감상을 적어두었는데, 망할, 10월 즈음에 프로그램이 리셋되는 바람에 그 모든 메모를 날려버렸다. 영화를 볼 때마다 별점을 매기고 20자 정도의 평을 써두었기 때문에 연말이 되면 이걸 다 모아서 한회분 칼럼으로 써먹으려 했는데(아, 제가 칼럼을 너무 쉽게 생각했나요?)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끈기가 없으면 기억력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기억하려는 끈기도 전혀 없어서 무슨 영화를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디지털이 편리하다지만 이런 식으로 몇번 뒤통수를 맞다보면 다시 종이와 연필을 찾게 된다.
왜 이맘때만 되면 애타게 영화를 찾을까
다행히 2008년의 다이어리는 남아 있다, 고는 하지만 정기이용권을 끊지 않고 샘플을 이용하는 바람에 1분 미리듣기밖에 하지 못하는 음원감상 사이트 숙명의 비회원처럼 초반 3개월의 메모밖에는 볼 수 없다. 그래도 보고 있으면 기억이 새롭다. 1월은 거의 매일 빼곡하게 메모를 했고, 2월에는 어럽쇼, 조금 나태해지더니, 3월에는,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4일에서 모든 메모가 멈춰 있다. 2008년 3월이라면 내 두 번째 단편집 <악기들의 도서관>이 출간을 앞둔 시기였으니 마지막 원고 확인 작업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게 분명하다. 최후의 날인 3월4일에는 이런 메모가 있다. “몸살 기운이 있었지만, 운동을 했다.” 아, 이 짧은 문장 속에 피곤과 고독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 뒤로 며칠 심하게 앓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이상 메모를 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08년의 1월에는 영화를 꽤 많이 봤다. 첫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에는 별 네개를 주면서 감격을 표현했고, <MR. 후아유>를 보고 나서는 정신없는 코미디에 별 세개를 주며 만족했다. 이어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고나서는 “심심하다, 그러나 중간중간 끊임없이 울었다”며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별은 세개 반. 그 다음날은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미스트>를 보았는데(<씨네21> 칼럼 연재하던 때도 아닌데, 뭔 영화를 이리 자주 봤단 말인가) 원작과 다른 결말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적으면서-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원작의 결말이 더 좋다- 별 네개를 주었다. <M>을 보았고,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를 보았고, <행복>을 보았고,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를 보았고, <브리치>를 보았다. 1월에 본 영화만 12편이다. 왜 이렇게 많은 영화를 보았을까. 1월이 되면 내 몸이 영화를 애타게 찾는 것인지, 이상하게 2010년 1월도 그렇다. 오늘이 1월5일인데, 나는 벌써 세편의 영화를 봤다.
2008년 2월의 메모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적은 게 아니라- 프렌치 레스토랑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아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나는- 일본 드라마 <임금님의 레스토랑>을 보고 적은 것이다. “화석에 상처를 내지 않고 흙을 털어내는 섬세한 작업이 좋아요. 생선가시도 잘 발라내요, 나.” “귀 후비는 거 잘하겠네?” “엄청 잘해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의 감독이자 뛰어난 코미디 작가인 미타니 고키의 따뜻한 유머다. 고고학자의 작업을 생선가시 발라내는 동작과 일치시키고 다시 그 섬세함을 귀 후비는 태도와 연결시키고 싶은 미타니 고키의 마음이 그때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2월의 다이어리 한가운데 이런 메모를 적어놓은 것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여겨졌다.
작심삼개월이더라도 또 다이어리를…
나에게 영화보기란 귀를 후비는 것과 비슷하다. 더 잘 듣기 위해 귀에 상처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귀지를 긁어내듯,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오동통한 생선살을 다치지 않고 가시만 깔끔하게 발라내듯, 나는 내 심장이 잘 뛰게 하기 위해 영화를 보며 핏속의 불순물을 제거해왔다. 내게 영화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매년 1월이 되면 새로운 각오를 다지면서, 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더 많은 상상을 하기 위해, 영화를 열심히 보려고 했던 것 같다.
흩어지라고 있는 게 마음이고, 마음이란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게 각오이므로 3월이 되고 4월이 되고 5월이 되어 문득 1월의 마음을 잃어버린 걸 깨닫게 되는 순간, (<개그콘서트>의 허경환 버전으로) 아~~~, 이래서 12월이 지나면 13월 대신 다시 1월이 오는구나, 생각하며 쓰다 만 다이어리 찾게 되는 순간이 오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귀를 후비는 이 고요한 1월, 다짐과 계획과 각오의 순간은 결국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해도 그 자체로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모른다.
올해에는 파란색 다이어리를 하나 샀다. 결국 3월을 넘기지 못하고 장렬히 전사한다 하더라도, 쓴 곳보다 빈 곳이 더 많더라도, 뭐 어떤가, 인생이 다 그렇지, 흩어지라고 있는 게 마음이고, 비어두라고 있는 게 노트고, 무너지라고 있는 게 다짐이고, 쓰라고 있는 게 돈이고, (이건 아니고) 자랑하려고 사는 게 아이폰이고 (이건 연수군이고), 어긋나라고 있는 게 계획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12월29일에 시작된 연수군의 (아마도 서른한 번째던가) 금연 계획은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 연수군의 건강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매번 반복되는 연수군의 다짐을 들으며 짜증내는 나의 건강을 걱정해서다. 아무튼 이렇게 2010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