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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캔 카운트 온 미
2001-12-11

시사실/유 캔 카운트 언 미

■ Story

혼자 아이를 키우는 독신 여성이자 은행 직원인 새미(로라 리니)는 새로 부임한 지점장 브라이언(매튜 브로데릭)의 융통성 없는 원칙 때문에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나머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남동생 테리(마크 러팔로)가 오랜만에 고향에 오는데, 기대에 부푼 새미와 달리 방랑아 기질의 테리는 누나와 조카의 안정된 생활을 헝클어놓는다. 그 절정은 조카 루디(로리 컬킨)를 생부에게로 데려갔다가 싸움질을 한 사건. 게다가 새미 자신도 브라이언과의 관계가 뜻밖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 Review 미국영화야? 제목은 ‘나에게 의지해라’쯤 될 테니 순진한 러브스토리에 해피엔딩이려나? 모든 게 잔잔하군. 풍경, 사건, 인물, 음악, 카메라까지. 흐음, 재미있어. 많이들 웃는군. 색다른 유머야. 어라? 엔딩도 특이해. 그럼 할리우드가 아니라 뉴욕에서 나온 미국영화? (자료를 뒤적뒤적) 그렇군.

뉴욕연극계 출신의 힘센 신인 케네스 로너갠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아이템을 영화 데뷔작으로 골랐다. 바로 시나리오의 힘을 과시하는 것인데,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얼핏 보면 밋밋한 단색조로 보이지만 조금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고운 색실로 잘 뜨개질한 겨울 스웨터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따뜻하고 살가운 촉감은 피부에 바로 밀착해 온다.

이 영화의 표면적인 구성은, 취향이 다르고 연애 관계도 제각각 꼬여 있는 남매가 얼마 동안 한 집에 머무르면서 겪음직한 자질구레한 이야기의 나열이다. 숙련된 극작가인 로너갠은 여기에다 문학과 연극, 영화가 오래도록 다루어온 몇 가지의 주제들을 겹쳐놓는다. 서사의 톤은 실내극적인 영화의 특성에 맞도록 앙증맞게 조율되어 있다.

이슈로 꼽을 만한 첫 번째는 외부와 단절된 소도시의 환경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심리적 영향이다. 영화의 무대는 가톨릭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뉴욕주 북부의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로 설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온 동네 사람이 다 친척 같고, 죄를 지었다 싶으면 곧장 마을 사제에게 달려가 얼굴을 맞대고 고해한다. 이런 환경은 안전하고 익숙한 느낌을 주는 반면, 모두가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특성 때문에 곳곳에 감시의 시선이 존재한다. 이 같은 공간의 이중성이 새미 캐릭터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동생에게는 어머니 같은 후원자이면서도 반듯하게 그어놓은 선이 헝클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바른 생활’ 강박증이라든가, 독신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악동 같은 은밀한 미소로 환영하면서도 스스로를 감시하고 벌주는 억압성이 새미의 내면에 공존한다. 영화 속에서 새미의 주제가는 사실상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지만, 그녀가 신나게 바람피울 때 ‘난 당신 인생에 또다른 여자예요’라는 팝 음악을 배경에 깔아놓은 것은 드라마와 음악 사이의 전형적인 대위법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비단 스콧스빌에 사는 새미만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경험하는 분열증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이자 이 영화의 가장 큰 흥미 요소는 새미와 테리로 대변되는 서로 다른 삶의 태도 문제이다. 신이나 가정에 강박되어 있는 ‘문명화된’ 삶의 양식과 길 위를 떠도는 ‘자연적인’ 삶의 양식 사이의 대비와 갈등은 미국 대중영화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서 반복되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어두움과 마늘냄새가 싫다고 도망간 호랑이의 야생성을 추방해버린 단군신화와 달리, 미국문화 속에서 허클베리 핀으로 대변되는 방랑자 캐릭터는 늘 대중과 예술가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장치는 문명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인간 내면의 억압을 완화시키는 기능을 하는가 하면, 필요에 따라 미국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완충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 때문에 대마초나 뻑뻑 피우고 임신한 여자 친구를 위해 누나한테 손 벌리러 온 테리가 따뜻하고 자유로운 품성, 나아가 자연친화적인 장점을 가지고 새미와 조카 루디의 단조로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테리가 늘 떠벌이는 알래스카는 서부극의 영웅들이 떠돌았던 서부의 대체물이다.

여기서는 정착과 방랑의 모티브가 여성과 남성에게로 나뉘어 가족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가족의 갈등과 새로운 관계 정립을 주제로 한 가족 드라마로 변주된다. 뉴욕의 문화적 엘리트 그룹에 속하는 개방적인 보수주의자답게 로너갠 감독은 이 문제에 대해 절묘한 균형을 취한다. 방랑자와 정착민은 서로를 따뜻이 감싸안으며 화해하면서도 결국 방랑자를 마을로부터 정중하게 추방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이 자동차를 타고 길 위를 흘러가는 새미의 모습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방랑자의 흔적은 정착민의 삶에 미묘한 움직임을 만들어놓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시종일관 “난 몰라, 상관 안 해”라는 식의 말만 하는 꼬마 루디(할리우드의 거물급 아역 배우인 매컬리 컬킨네 7형제 가운데 막내둥이 로리 컬킨이다)는 바른 생활 어머니와 방랑자 삼촌으로 대변되는 두 가지 기류 사이에 끼어 있는 미국인의 나이브한 표상처럼 보인다. <아메리칸 뷰티> 이후 최고의 가족 드라마라는 평판이 그럴싸하게 들리긴 하지만 <아메리칸 뷰티>가 냉혹한 시니시즘을 바탕으로 미국 소시민 가정을 내부로부터 폭파시켜버린다면,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가족의 위기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틀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감독과 제작진

스코시즈 사단, 뉴욕 군단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할리우드와 대비되는 뉴욕영화계의 특성과 파워를 잘 보여준다. 브로드웨이에서 잘 나가는 극작가였고 <애널라이즈 디스>를 비롯한 몇몇 할리우드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지만 영화감독으로서는 신예인 케네스 로너갠의 후원자이자 바람막이가 되어준 사람이 바로 뉴욕영화의 대부인 마틴 스코시즈이다. 극 구성과 배우 연기의 조율 면에서 연극계 출신 특유의 장점을 발휘하지만, 숏이나 편집 등에서 연극계 출신 특유의 약점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 대해 스코시즈가 무어라고 평했을지 궁금하다.

제작자로 나선 존 하트는 토드 헤인즈, 신디 셔먼과 같은 뉴욕의 개성파 인디감독들을 발굴했고 스물다섯개가 넘는 토니상 트로피를 가지고 있다는 인물이며, 또다른 제작자인 제프리 샤프와 바바라 드피나 역시 각각 올리버 스톤, 마틴 스코시즈와 함께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이들 뉴욕 군단은 로너갠이 들고 온 <유 캔 카운트 온 미>의 시나리오에 홀딱 반해 즉시 판권을 계약하고 캐스팅과 로케이션에 나섰으며, 선댄스와 베니스, 아카데미 등 가지각색의 영화제로부터 호평받는 결과를 뽑아냈다.

할리우드의 화장실 유머에 지친 미국 평론가들도 일상생활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바탕으로 확고하게 구축된 캐릭터와 짜임새 있는 대사, 게다가 종종 터지는 소박한 유머에 대해 ‘제2의 우디 앨런이 떴다’고 호들갑스런 지지를 보냈다. 로만 칼라를 목까지 채우고 뚱한 얼굴로 지루한 역할을 해야만 하는 사제를 로너갠 감독 자신이 맡았는데, 그의 얼굴이 풍기는 어수룩하고 코믹하면서도 못 말리게 따뜻하고 어쩔 수 없이 지적인 느낌이 바로 이 영화의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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