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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클론 아닌 사람 있소?

‘위장된 참’과 싸우는 <더 문>과 최근 SF영화들을 살피다

1. 올해는 SF영화를 좋아하는 나 같은 관객에게 ‘마무리가 행복한 한해’로 기억될 것이다.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 부자(父子)는 군대를 몰고 꼭 돌아오리라는 무시무시한 약속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이어서 당신도 혹시 프로그램된 클론 아니냐고 섬뜩하게 질문하는 던컨 존스의 <더 문>이 개봉되었다. 안 그래도 거미줄처럼 금 간 현대인의 정체성은 이 작품 특유의 느릿느릿하고 착 가라앉은 명상적 주파수에 진동하다가 사정없이 파괴되어버릴 것 같다. 게다가 60년대 말 이후 오래도록 전세계 사람들의 뇌리를 뒤덮었던 흑백의 달 풍경 사진은 황량하고 초현실적인 사색의 이미지로 경이롭게 재탄생했다. <디스트릭트9>이 폭로했던 인간중심주의의 ‘사악함’이라는 주제는 <더 문>에서 ‘소모품이자 복제된 자아의 재발견’, ‘영상 매체가 주는 거짓 희망이 견인하는 일상’, 혹은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반복하는 삶에 대한 처절한 회의’라는 다소 철학적 주제로 이동했다. 곤충 외계인을 소재로 ‘위선’과 싸우던 1교시 감상 시간에서 복제 인간을 소재로 ‘위장된 참’과 싸우는 2교시로 접어든 느낌이다.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처럼…

2. 전설적 로커 데이비드 보위는 아들이 만든 이 영화에 영감을 준 게 틀림없다. 그는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던 1969년에 <Space Oddity>라는 노래를 발표해서 NASA 프로젝트를 우회적으로 비꼬았다. 임무를 수행하다가 절망에 빠진 (가상의) 우주인의 심정을 노래한 가사는 <더 문>의 톤을 몇줄로 압축해놓은 것 같다.

“Here am I floating round my tin can…/ Planet earth is blue/And there's nothing I can do….”

냉전시대의 척박함이 개인에게 강요했던 암울함은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쇠퇴하는 국운에 시달리는 미국인의 공허한 심리로 재연되었다. 확실히 그때와 지금 사이에는 역사적 전환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빌렘 플루서라는 매체철학자는 흑백사진은 사실을 반영한다기보다는 광학이론의 관념세계를 표현한다고 한 적이 있다. 흑과 백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와 삶이라는 극단적 정황을 사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화 속 달 풍경은 형광물질의 푸르스름이 감도는 침묵하는 진공이다. 극한의 빛과 온도, 거대한 크레이터와 날리는 흙먼지, 그 위를 촘촘히 수놓은 영롱한 별빛, 우뚝 서 있는 아날로그적인 중장비들. 올해 초에 개봉했던 <알파독>의 살해장면도 이와 비슷했다. 쏟아질 것 같은 별들과 풀 한 포기 없는 바위산 그리고 주인공들을 둘러싸고 아주 서서히 도는 풍력발전기- 이런 세 가지 요소의 조합은 언제나 형이상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더 문>의 압권은 관조적이고 황량한 환경에서 동일한 기억이 주입된 두명의 복제인간이, 자신들이 부인으로 기억하는 테스를 추억하며 함께 흥겨워하는 장면이다. 똑같이 생긴 이들이 똑같은 향수에 젖고 동지애를 느끼면 느낄수록 관객은 이들이 3년을 수명으로 하여 버려지는 클론이라는 데 더욱더 비애를 느낄 것이다. 표준화되고 소외된 현대인의 면모에 대한 촌철살인의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소모품이고 몰개성적인 쌍둥이들이며 그러한 한에서 공통의 기억을 향유하는 애틋한 동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동시대적 멘털리티에 대한 신선한 풍자는 수많은 과거 SF영화의 모티브를 ‘태연히’ 물려받은 가운데 이루어졌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중앙컴퓨터, <사일런트 러닝>에서 불모지로 변한 지구를 선회하는 온실 우주선, 대기업의 음모와 복제인간의 귀환을 다룬 <블레이드 러너> <에이리언> <아일랜드>, 정신이상 증세를 겪는 승무원을 주인공으로 한 <솔라리스> 등이 그것이다. <더 문>의 예고편만 보았을 때는 이미 질린 설정들이 재탕될 것 같은 불신이 들 정도였다. 사실 나는 중앙컴퓨터와 인간의 싸움이나 자아의 해리로 분열을 겪는 이야기가 아니길 기도했고 다행히 감독은 이런 나의 소원을 미리 알고 있었다.

허구 안에 오히려 참이 존재한다네

3. 영화의 전반부에서 샘 벨과 관객은 함께 착란을 겪는다. 샘은 오랜 고독으로 환각에 시달리다가 기지 외부에서 사고를 당했다. 이어지는 기지 내부신에서 의식을 회복한 샘은 “내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지?”라고 컴퓨터 거티에게 묻는다. 신체의 ‘얼룩’(화상 자국)으로만 구별되는 두명의 샘이 같은 프레임 안에서 티격태격하는 순간에도 관객은 어떻게 샘이 둘이 될 수 있는지 혼란스럽다. 엄밀히 말해 관객이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환각이 아님을 완전히 확신하는 순간은 지하방에 누워 있는 수많은 샘들을 두 샘과 함께 발견하고 나서이다.

단지 이야기 구조로만 따진다면 이런 착란은 지구에 위치한 기업의 어처구니없는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SARANG)이라는 이름의 한·미 합작회사(감독은 자신의 과거 여자친구가 한국인이었고 한국이 로봇 강국이어서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는 클론들이 서로를 보지 못하게 하고 지구와의 통신을 방해전파로 차단했다. 이러한 ‘율법’은 그 자체로서 이미 윤리를 저버린 것이지만 관객과 주인공이 겪은 착란은 오히려 그 ‘율법’의 위반에서 비롯된다. 기업엔 인간과 똑같은 자의식을 가진 클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극한 환경에서 변칙적인 문제를 창조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의식은 타인과 구별되는 독특한 지각과 기억 위에서만 성립한다. 나는 나 이외의 세계를 지각해야 하며 나를 움직이는 힘은 나만의 기억과 희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은 그러한 (정보차단이라는) 금기하에서만 가능하며 내가 수많은 복제물 가운데 하나이며 내 기억이 주입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이른바 “끔찍한 실재와의 마주침”이라는 충격현상이 나타난다. 이때 불러일으켜지는 정서는 ‘원본의 희생양임이 밝혀진 클론의 자기연민’(<아일랜드>)이나 ‘야만적인 과학기술과 기업의 음모에 치미는 분노’(<에이리언3>)와는 미묘하게 다르다. 오히려 어떤 쾌감, 현실을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개성’있게 살아간다고 믿는 우리의 눈에 얇게 드리워진 비닐을 갑자기 걷어내는 느낌 같은 것이다.

그러나 <더 문>의 문제의식은 라캉의 도식을 넘어서는 데 있는 것 같다. 상징계에 다름 아닌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사이의 엄격한 격리, 허구적 자의식의 유지를 위한 기억의 철저한 소급적 재구성 같은 기제들이 백일하에 폭로되었을 때 두명의 샘이 걸어간 행로는 이를 말해준다. 노화가 급속히 진행하는 샘과 탈출을 계획하는 갓 태어난 샘은 마치 부자관계처럼 서로를 위해 희생하려 든다. 또 다른 인공지능인 거티까지 이들을 돕는다. 그의 패스워드 입력으로 우주 기지의 역사가 복원되고 목성에서 인간 구조팀이 오기 전에 기계로서는 하기 힘든 결단(자기 기억의 삭제)을 거티는 스스로 수행한다. 다시 말해 인위적 복제품들은 스스로를 긍정하고 다 함께 살길을 모색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든다.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 가운데 클론 아닌 사람이 있을까? 아니, 반대로 우리가 도달하거나 복귀해야 할 유일하고 본래적인 상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복제가 실재를 이기고 있다고 보들리야르는 그토록 한탄했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영화 속 젊은 클론이 나이든 클론의 상처를 닦아주었던 것처럼 오히려 사소한 차이 아래 뭉친 유사한 존재들 사이의 연합이 아닐까? 그러므로 <더 문>은 모든 참이란, 스스로를 참이라고 여기는 허구들을 위한 허구적 좌표에 불과하며 반짝거리는 허구 안에 오히려 참이 존재한다는 역설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간단히 말해 ‘거짓의 역량’이다.

역설적 희망을 발견하고자 애쓰다

4. 네가 보았던 것을 내가 기억하고 내가 기억한 사건이 네 입에서 흘러나온다는 일은 대개 변태적 관음증의 산물이거나 가상현실을 이용한 중독성 도취(<스트레인지 데이즈>(1995)) 같은 부정적 문제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더 문>은 논리의 기계화(컴퓨팅)가 더욱더 극단으로 치닫는 이 시대에서 역설적 희망을 발견하고자 애쓴다. 생체 권력은 인스턴스식으로 소비할 창조적 신체를 양성하기 위하여 인간적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그 다른 한편에서 교육받은 노동자들의 지각과 기억을 한덩어리로 유동화할 것이며 이들의 반란에 기계화된 중간 관리자(거티)를 합세시킬 것이라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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