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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폭력과 여성의 희생 <저녁의 게임>
이영진 2009-10-28

synopsis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 탓에 성재(하희경)는 종종 봉변을 당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함께 사는 늙은 아버지(정재진)는 보호자가 아니라 무뢰한이다. 치매 증세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아버지는 심지어 딸의 속살을 훔쳐보려고까지 한다. 정신 놓은 아버지와의 불편한 동거를, 그러나 성재는 체념하고 감내한다. 집 나간 오빠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버지와 한바탕 전쟁을 치른 성재는 우연히 푸른 수의를 입은 죄수(윤배영)가 탈옥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그날 이후 성재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청량한 휘파람 소리에 빠져든다.

피터 폴 루벤스의 <시몬과 페로>란 그림이 있다. 손과 발이 묶인 늙은 죄수가 젊은 여성의 가슴을 빨고 있고, 철창 바깥에선 간수들이 망측한 상황을 훔쳐보고 있다. 이 그림의 내력과 의미에 대해서는 별별 설이 많지만, <저녁의 게임>에서 <시몬과 페로>(영화에서 성재가 슬쩍 들춰보는 바로 그 그림)는 남성의 폭력과 여성의 희생에 관한 극단적인 은유다. 첫 장면에서 성재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길을 가로막았다는 이유로 트럭 운전사에게 뺨을 맞는다. 이 장면에서 특이한 건 트럭 운전사의 복장이다. 스모 선수 같은 요상한 옷을 입고 남자는 폭력을 휘두른다. 집에서도 성재는 폭력에 무방비상태다. 아버지는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딸에게 목욕을 시켜달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아랫도리는 자신의 눈앞에 선 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저녁의 게임>에서 모든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도착(倒錯)이다. 심지어 성재의 집에 기웃거리는 아이의 시선조차도 엉큼하게 보인다. 성재는 금기와 윤리마저 무시되는 폭력지대에서 빠져나갈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성재는 또 다른 현실로 도피하는 대신 자신만의 환상으로 빠져든다. 그 안에서 자위한다. 잠깐 등장하는 탈옥수도 성재의 환상을 매개하는 역할만을 부여받는다. 영화의 마지막, 성재의 삶이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가부장제 폭력을 다뤘다는 점만 놓고 보면 그닥 새롭지 않지만 독특한 리듬감으로 현실과 환상을 교차시키는 이야기 직조는 주목할 만한 요소다. 성재 역의 하희경은 <백마강 달밤에> <천년의 수인> 등에 출연한 연극배우이며, 최위안 감독은 과거 <꽃을 든 남자>의 책임 프로듀서를 맡았던 드라마 PD 출신이다. 오정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으며, 올해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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