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독설을 써야 한다는 통보를 듣고 무엇을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699호에 실린 강의의 반론을 발견했다. 일단 졸고를 읽어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를 드리고, 무엇을 쓸지 고민할 필요가 없게 도와준 점에 대해서도 역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 반론을 읽다 보니 부연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강의의 반론은 제목에서 확 짚어준 것처럼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다. ‘맥락’의 개념은 좀 모호하지만 어쨌거나 개봉 지원에 동의하나 제작 지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 의견을 비판하는 논리로, 영진위가 적극적으로 제작 지원을 했던 이유가 ‘국가의 문화정책, 특히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적 가치와 필요성’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산업과 한국의 영화문화가 양질의 전화를 기할 수 있는 정책이라면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백화점식 지원정책을 펼쳐왔’다고 말한다.
맞다. 지금까지 영진위가 그런 이유로 제작 지원을 했고, 그런 방식으로 막대한 제작 지원을 했다. 그러니까 그걸 점검해보자는 것이다. 결과론적 양태에만 집착한다고 했는데, 어떤 정책이건 수행해본 이후에는 그 성과를 따져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짚어보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다. 역사적 당위성으로 엄청난 제작 지원을 했다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옳고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받아야 하나? 당위성은 말 그대로 당위성일 뿐이다. 문화적 다양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작 지원을 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건 너무나 편리한 주장이다. 정부에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은 옳지만, 그것이 제대로 수행되었는지는 수시로 따져보고 구체적으로 지원 정책을 변화시켜야 한다.
노무현 정권은 정당성이 없어서 실패했나
또한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에, 모든 정책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도 오만이다. 역사적 정당성이 있는 노무현 정권이 왜 실패작으로 귀결되었을까? 그들에게는 정당성은 물론 올바른 정책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에서 문제가 많았다. 이를테면 기자실 폐쇄 같은 것은 언론 개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었다. 노무현은 자신에게 정당성이 있고 옳다고 생각했기에 남들이 뭐라 하건 그냥 밀고만 나갔고 결국은 역풍을 맞아 좌초했다. 자칭 뉴라이트인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게 된 이유는, 노무현 정권에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역사적 정당성이 있기 때문에 올바른 정책을 구현하려 했기 때문에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세상은 역사적 정당성과 맥락만으로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
기왕 반론을 펼쳐주려면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백화점식 지원정책’이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지 보여주었으면 한다. 사실 내가 알고 싶은 것이 그런 구체적인 수치다. 한국영화의 중흥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백화점식 지원정책을 펼쳤다면 그것도 강산이 변한다는 10년간 꾸준히 지원을 했으니 문화적 다양성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구체적인 평가를 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문지이자 정론지임을 자임하는 <씨네21>을 봐도,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백화점식 지원 사업을 ‘기업이 해야 하는 일조차 빼지 않고’ 펼치고도 지금 영화산업이 엄청난 위기에 놓인 이유도 잘 모르겠다.
영진위의 미래 과제 제시도 언론의 몫
강의가 ‘엽기적’이라고 비난한 ‘지금까지의 영진위를 절대적인 선(善)으로 놓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비난하는 것은 독선적인 태도’라고 내가 말한 것은 <씨네21>의 보도 태도에 대한 비판이었다. ‘<씨네21>을 비롯한 영화계 주변 언론의 태도’라고 적시도 했는데, 혹시 그 문장은 빼고 읽은 것일까? 싫어하는 문장이나 단어 몇개로 00편이라고 몰아붙이면, 그것이야말로 기존 영진위를 ‘좌빨’이라고 몰아붙이는 세력들하고 뭐가 다른가?
어쨌거나 정권이 바뀌었고, 그 여파로 영진위 위원장도 바뀌었다. 누구나 앞으로 영진위의 행보에 파란이 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다면 정론지인 <씨네21>은 당연히 그 행보에 대한 분석과 예측을 해야 했다. 그런데 <씨네21>은 달랑 강한섭이 과거에 쓴 글들을 분석하며 조롱하는 특집기사를 마련했다. 음, 그래서 강한섭이 멋대로 말을 바꾸고 오락가락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그냥 지켜보고 있다가 엉뚱한 짓을 하면 그러니까 과거 영진위를 ‘좌우 프레임’으로 싸잡아 비난하면 그런 행태만을 비판하면 되는 것일까?
<씨네21>이 오랫동안 중심을 지켜온 정론지라면 강한섭이 영진위 위원장으로 해야 할 일들을 미리 제시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지난 영진위의 정책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그런 평가를 바탕으로 지금 영진위에 필요한 과제들을 알려주는 것도 언론의 몫이 아닐까? <씨네21>은 그냥 강한섭을 조롱하고, 과거의 영진위는 이랬는데 지금 영진위는 그걸 바꿔놓았다, 는 식의 기사만 양산했다. 지금 영진위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알겠는데, <씨네21>의 주장은 과거에 했던 대로만 하면 된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기사였다. 강의의 말대로 영화계의 의사소통을 통해서 1999년 영진위의 정책 기조가 마련되었다고 하면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한낱 평론가가 그런 걸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니까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씨네21>의 기자들이 제대로 된 평가 기사를 써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과거가 옳았건, 지금이 틀렸건,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 그냥 객관적인 수치만을 나열한 기사라도.
차라리 예술영화 틀어주는 소극장 지원을
지난 글에도 말했지만, 나는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제작 지원을 해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예술영화를 더 많이 볼 수 있는 소극장을 서울 곳곳이나 지방 중소도시에 만들어 국가에서 지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영화 한편에 지원할 몇 억원으로 필름포럼이나 서울아트시네마 같은 시네마테크를 지원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술영화에 투자할 개인이나 사기업이 없기 때문에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러면 국가에서 예술영화에 대한 지원을 거의 하지 않는 외국에서는 어떻게 그런 영화들이 나오는 거지? 예술영화가 반드시 대중성을 갖출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객과 멀어져만 가는 예술영화를 만드는 영화인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는 걸까? 그들이 위대한 예술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왜 국민의 세금을 지원해야 하는 걸까? 왜 한국사회에서는 뉴라이트건 좌파건 혹은 정치인이건 문화예술인이건 자신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위대한 망상에 푹 빠져 사는 것일까?
사실 그동안 영진위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기업이 해야 하는 일조차 빼지 않고 백화점식 지원정책’을 펼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 한국영화는 위기이고, 볼만한 한국영화는 오히려 찾기 힘들어졌고, 외국의 다양한 예술영화나 저예산영화가 개봉하는 비율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런 이유에서도 나는 제작 지원이 영진위에서 우선적으로 다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과거 영진위가 절대적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영진위가 잘하고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지금 영진위가 펼치는 제작 지원 역시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의가 인용한 말처럼 문제는 국가의 개입이 아니라 ‘스타일과 행정의 개념’이다. 그걸 결정짓는 것은 ‘역사적 맥락’이 아니라 구체적인 성과이고 현실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