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 소년은 장년의 중후한 신사로 변했다. 그렇지만 그의 눈에서 더이상 젊은 날의 열정과 치기를 찾을 순 없었다. 돌이켜보면 기이하고, 한편으로는 역겹기도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그런 여성이었다. 그녀, 조난실은. 해방과 전쟁의 틈바구니에 낀 1940년대 말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에서 전차를 잡아 타고 마포 종점으로 가던 경기고 3학년생 해명은 비오는 거리에서 30대 중반의 전차 차장 조난실을 만난다. 아름다운 그녀를 잊지 못한 해명은 수소문 끝에 난실의 서울 순화동 자취집을 찾아낸다.
“찾아왔으면, 지하에서 불 때게 석탄 좀 퍼와.”
난실의 당돌한 명령에 이끌리듯 지하로 내려간 해명은 석탄 더미를 쏟는 바람에 옷을 버린다.
“물을 데울 테니 옷을 벗으렴.”
뻘쭘해하는 해명을 욕조로 옮긴 뒤 난실은 뒤에서 해명을 끌어안는다.
50년대 히로인 <자유부인>도 울고 갈 대담한 애정행각을 나눈 뒤 난실은 해명에게 사랑을 나누기 전에 책을 한권씩 읽어줄 것을 요구한다. 해명은 그런 난실에게 이광수의 <무정>, 일제 때 유명했던 기생 <강명실전>, 호머의 <트로이의 목마> 등을 읽어준다.
어느 날 난실은 사라지고, 법대에 진학한 해명은 재판을 방청하다 반민특위에 잡혀온 난실을 발견한다.
“조분자! 서대문 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지?”
그녀의 이름은 난실이 아닌 분자였단 말인가. 혼란에 빠진 해명.
“좋아. 당신의 필적과 독립운동가의 조서 속에 나타난 필적을 대조해보겠어.”
언뜻 당혹스러운 표정이 비쳤을까.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는 다른 친일 부역자들과 달리 난실은 “내가 조서를 썼다”고 자백한다. 배신감에 치를 떤 해명은 난실에게 특별 면회를 신청한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요. 당신 이름이 뭐죠? 난실인가요? 분자인가요?”
아득한 표정으로 먼 산을 응시하던 난실은 해명에게 14살이 되던 어느 오후 헌병 오장 나까무라와 나눈 대화를 읊조리듯 들려준다.
“꼬마야. 호적 조사 나왔는데. 이름이 뭐지?” “또옹녀요.”(개미만한 목소리로) “음, 그런가.”
소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던 것일까. 나까무라상은 그녀의 성명란에 ‘똥녀’ 아닌 ‘분자’(糞子)라고 적는다. 그래봐야 일본어로는 분꼬. 어차피 똥이다.
“난 내 이름을 숨기고 싶었어. 아무도 형무소 고문 담당 간수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거든.”
장년의 신사로 변한 해명은 아직 형무소에 갇힌 난실을 위해 개명 신청 작업을 마치고 이를 증명하는 서류를 보낸다. 그렇게 얻게 된 그녀의 이름 조.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