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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잘 만드는 게 진정성이야
김연수(작가) 2009-04-09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뭄바이 빈민들의 현실을 외면한 영화란 시각에 이의를 제기함

두 번째 책 <침이 고인다>를 출간한 뒤, 소설가 김애란은 한 인터뷰에서 “이젠 얼굴로 승부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어쩐지 “이젠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김현희를 떠올리게 하는 멘트였다. 나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제일 싫어했던 얘기가 바로 그 소리였다면 믿으시려나? 믿거나 말거나 나는 오직 문학성 하나만으로 승부하고 싶었다. 그런 내게 얼굴은 천형처럼 내 인생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고 혼자 고민하면서 지새운 숱한 밤들이 있었다, 고 내 입으로 말하려니까 좀 거시기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어쨌든 한때 소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사막이요, 문학성은 오아시스처럼 그 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한 적은 분명히 있었다. 소행성 B612호에서 온, 노을을 무척 좋아하던 그 애어른 어린왕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긴 내가 처음 문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제일 많이 듣고 떠들어댔던 단어가 진정성이라는 것이었다. 일단 진정성의 세계에 매료되면 빨간 약을 삼킨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세속적인 모든 것들이 사막의 모래인 양 바라보게 된다. 이 빨간 약의 부작용이 있다면 사람들의 소소한 꿈들을 폄하하게 된다는 점이다.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노력하면서 조금씩 꿈을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 자체가 한심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얼마 전에 아무리 수필이지만 이렇게 붓 가는 대로 글을 쓰다가는 <씨네21>에서 잘릴 게 분명하다며 고향 친구와 서로 대책회의를 한 일이 있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밤을 꼬박 새운 그 대책회의의 결과, 우리에게는 이튿날 오후까지 질기게도 곁을 떠나지 않은 정겨운 숙취님과 그 이름도 아름다운 진정성, 오직 그 마음 하나만 남게 됐다. 그래,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 더이상 입사시험에 떨어진 얘기 따위로 승부해선 안돼. 우리도 ‘카쉬에 뒤 시네마’처럼(“카이에야”, 고향 친구가 바로잡았다) 글을 써야만 해.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기 위해 극장 안 의자에 앉았을 때, 나는 그런 사명감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군무장면이 당의정에 불과하다고?

지난해에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Q & A>를 읽었다. 그때도 내 곁에는 숙취님이 머물고 계셨고, 해서 이것저것 책을 들춰보다가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이었다. 도대체 진정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책이어서 하하하, 낄낄낄 웃다보니까 그만 책을 다 읽어버리고 마는 허망한 일이 벌어졌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발리우드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발리우드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인도 사람들은 참 인생 쉽게 사는 것 같다. 스토리가 지루해질라치면 느닷없이 산꼭대기에 남자주인공을 데려다놓고 카메라를 360도 회전시키면서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거 어쩌란 말이냐? 게다가 그 촌스러운 반짝이 의상이며 갑자기 떼를 지어 나타나서 주인공과 함께 춤을 추는 여자들은 또 뭐란 말이냐? 그런데 발리우드영화를 다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긍정의 힘이 내 몸속에서 솟구친다. 이런 영화도 끝까지 봤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마침내 극장 안의 불이 꺼지고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물론 대니 보일은 영국 감독이지만, 인도가 배경인 영화이니 배우들이 느닷없이 춤을 추면서 노래한다고 해도 그 안에 담긴 진정성만 꿰뚫어보리라. 그런데 영화는 쉽게 시작하지 않고 무지하게 많은 수상목록만 나왔다. 그걸 너무 열심히 읽었기 때문이었는지 자밀이 사인을 받기 위해 똥무더기 속으로 빠졌을 때부터 내 눈은 게슴츠레 풀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자밀이 너무 귀여워서. 눈은 부리부리, 뺨은 오동통통. 그 얼굴이 어찌나 귀여운지 뭄바이의 빈민가마저 사랑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되찾았다. 맞아, 진정성. 진정성을 가져야지. 하지만 그럴라치면 영화는 기막힌 운명의 장난으로 자밀에게 돈무더기를 안겨주고 있었다.

여기서 돌발퀴즈. Q: 소중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A. 시력이 나빠서 B. 멀리 있어서 C. 다른 걸 보느라고 D. 보여줄 수 없으니까. 힌트를 주자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D:It’s written’만 남고 다른 오답이 모두 사라진 뒤에 이 D가 ‘Directed by’로 연결된다는 점일 것이다. 어쩌면 진짜 정답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뭄바이 플랫폼에서 자밀과 라티카는 그토록 내가 기다리던 군무를 시작한다. 이 군무장면은 발리우드영화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영화 전체가 뭄바이 빈민들의 현실을 외면한, 당의정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갖게 할지도 모른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대한 비판의 핵심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듯하다. 확실히 환상을 가로지르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가 많아 보이니까.

대니 보일은 예술가니까 ‘우회’한 거지

그러나 예술가는 환상을 가로지른 뒤에 현실을 다시 한번 우회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건 우회한다는 점이다. 대니 보일이 정답 D를 활용해서 자기 이름을 엔딩 크레딧에 올릴 수 있었던 까닭도 그가 우회했기 때문이다. 우회하게 되면 수많은 기교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진정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수많은 기교들이 사막의 모래처럼 허망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의 내 생각도 그랬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법칙에 나오는 조언처럼 예술도 중요하고 시급한 것을 가장 먼저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적인 퀴즈쇼가 있다면, 정답은 항상 D일 것이다. A와 B와 C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정답이 나올 테니까. 사람들은 대개 진정성의 반댓말이 웰메이드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워낭소리>의 편집을 둘러싼 논란도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난 예술에서 진정성이란 곧 웰메이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역시 잘 만들었기 때문에 진정성이 생겼다. 적어도 전세계인들에게 뭄바이에 수많은 빈민이 산다는 사실은 알려줄 수 있었으니까. 이 영화를 본 다음날, 철거민들이 불타죽은 용산 제4구역을 지나갈 일이 생겼다. 그 구역 전체는 거대한 의문부호처럼 내게 남아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한수 배웠다. 말할 게 있다면, 잘 만들어야만 한다는.

돌발퀴즈의 정답 역시 D다. 소중한 것을 보여주려고 할 때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그건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의 진정성 역시 마찬가지다. 진정성만 있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청년 시절이 지나고 나니까 표면과 속은 본디 하나였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얼굴이 예쁘다고 마음까지 예쁘다면 억울해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마음이 예쁜 사람들은 대개 얼굴이 예쁘다. 그런 점에서 김애란의 얼굴도 예쁘다고 말하자면, 그녀의 승부욕을 꺾는 일이 되겠지만, 뭐 원칙이 그렇다는 얘기다. 잘 만드는 게 진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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