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위해 마시고, 기념하기 위해 마신다. 스스로를 치하하려 마시고, 벌하려고 마신다. 타인과 어울리기 위해 마시고,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어서 마신다. 우리는 수천의 핑계를 싸들고 술에 투항한다. 그림 속 남자는 혼자다. 어쩌면 친구들과 어울린 거나한 술자리를 파한 뒤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한병의 마개를 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독대했던 술병마저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남자는 마침내 완벽히 혼자가 되었다. 알코올은 육신을 마비시키고 의식을 펌프질한다는 속설을 확인하듯, 사내는 몸뚱이가 없고 머리만 있다. 주름이 고랑을 판 이마, 수염 그루터기가 까칠한 턱, 그의 얼굴에는 입이 없다. 커다랗게 열린 외눈만이 징그럽도록 부릅뜬 의식을 증명한다. 남자는, 화가다. 갓도 없이 늘어진 백열전구가 초라한 붓 한 자루와 그보다 더 미력해 보이는 책에 빛을 떨구고 있다. 필립 거스톤의 <머리와 술병>은, 그가 사랑했다는 화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작품과 더불어, 내가 아는 고독에 관한 가장 외설적인 그림이다.
필립 거스톤(1913∼80)은 전후를 풍미한 뉴욕 추상표현주의 화가군의 일원이었다. 회색과 분홍으로 대표되는 두터운 색면으로 점철된 초기작은 그에게 빛나는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1960년대 말, 몇년 동안 침묵을 지킨 거스톤은 1970년 표변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열었다. 추상주의의 기수가 구상(具象)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것도 만화적 형태와 의도된 조야함이 출렁거리는 구상으로! 결과는 스캔들이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자칫하면 경찰이라도 부를 기세였다. 지금 듣기엔 호들갑스럽지만, 당시 추상과 구상은 화해불가한 종파와 같았다. 추상주의는 독일 나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핍박받은, 자유의 깃발 비슷한 무엇이었다. 화가가 남긴 말들로 미뤄보건대 거스톤을 ‘변절’시킨 동력은, 추상주의에 씌워진 ‘순수회화’라는 왕관에 대한 가책이었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불순한 것, 불순의 끝까지 무릎팍이 까지도록 기어가는 것이었다. “60년대에 들어서자 나는 분열증에 걸린 기분이었다. 전쟁, 미국의 현실, 세계의 잔혹함. 집에 앉아 잡지를 읽고 좌절과 분노에 빠져 있다가, 빨강을 파랑으로 바꿔 칠하러 화실로 가는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일까. (중략) 나는 어린 시절처럼 다시 완전해지고 싶었다. 나의 사고와 감정 사이에서 온전히 존재하고 싶었다.” 추상과 구상 사이에서 거스톤이 치른 투쟁은 바꿔 말하면 세계를 바라보면 자신이 작아지고 자아가 커지면 사물이 흐릿하게 보인다는 딜레마였을 것이다.
<머리와 술병>을 포함한 거스톤의 많은 후기작은 *사이클롭스(Cyclops)의 형상으로 그려진 자화상과 사적인 아이콘으로 메워져 있다. 시계, 전구, 물감통과 붓, 밑창을 기운 구두, 거의 타들어간 담배, 끈질긴 모티브였던 KKK 단원의 형상 등등. 거스톤의 다른 작품 <침대에 누운 화가>에서 화가는, 물감통에 뒤덮인 이불 아래에서 건공중을 말똥말똥 응시하고 있다. 연인과 동침한 모습을 그린 <침대의 커플>에서조차 화가는 신발을 신은 채 누워 이불 밖으로 내민 한손으로 붓을 움켜쥐고 있다. “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린다.” 화가의 무력감은 자화상에서 몸을 절단했고 할 말을 잃은 입술도 지웠다. 남은 건 오직, 아비지옥 앞에서도 영원히 감지 못하는 저주를 받은, 예술가의 눈꺼풀뿐이다.
*사이클롭스(Cyclops) 그리스 신화의 외눈거인. 신의 세계를 평정한 제우스에게 천둥을 선물했다고 한다.<오디세이아>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등장해 귀향길의 오디세우스에게 모진 꼴을 당한다. <엑스맨> 시리즈에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돌연변이(제임스 마스든 분)의 닉네임으로 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