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프로필
1971년생
1990년 한성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입학
1996년 한겨례 문화학교 3기 영화제작학교 입학
1997년 영화터 ‘창’ 설립, <필름컬처> 주간영화제 참여
1998년 제2회 부천영화제 오퍼레이터
1999년 제3회 부천영화제 오퍼레이터, 다큐멘터영화제
2000년 제4회 부천영화제 기술팀 스탭,
‘오슨 웰스 회고전’ 기술팀
2001년 제3회 여성영화제 기술팀 스탭,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술팀
올해로 서른두살이 된 송미선씨. 맞선을 보라는 부모님의 성화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건만 매번 자신의 직업을 상대에게 설명하는 일이 부쩍 번거롭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기자나 선생이라고 하면 단박에 고개를 끄덕일 텐데 “자막일 하는데요” 하면 한참 뜸을 들이다 “아, 번역하는 거요” 하고 엉뚱한 데를 짚기 일쑤다. 하긴 자신도 영화일을 시작하기 전엔, 자막담당이라고 하면 “와, 영어 하난 끝내주겠군” 했으니까.
각종 영화제를 돌며 자막일을 본 게 벌써 6년째다. 프로그래머가 식탁을 차리고 홍보가 초대를 하는 일이라면, 자막은 차려진 음악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침과 같다. 침없인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듯 다른 언어권의 영화를 우리말로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게 자막일이다. 한국의 영화제 자막처리 방식은 일반극장 상영때나 외국영화제와는 사뭇 다르다. 극장용과 달리 빌려다 쓰는 필름에 자막을 입힐 수가 없다. ‘희귀문자’인 한글자막을 출품자들이 입혀 놓을 리도 없다. 컴퓨터를 이용해 자막 영상을 화면에 쏘는 간접처리 방식이 개발된 건 영화제 사람들에겐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필름 위에 매겨진 타임코드에 따라 자막이 시작되고 끝나는 점을 ‘찍은’ 뒤, 적절한 길이로 다듬어진 번역자막을 영사기를 이용해 스크린 한쪽에다 띄우는 것이다. 상영장 어딘가에서 컴퓨터를 매만지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자막담당이다.
돌이켜보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다섯해였다. 지난해 ‘오슨 웰스 회고전’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찌르르한다. 프로그램을 다 짜놓은 노트북이 극장 안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 무단취득자를 원망할 틈도 없이 부랴부랴 빌려온 데스크 탑에서 작업하던 중 파일이 깨지는 바람에 1시간여 만에 상영이 중단됐다. 부천영화제 사무국까지 가서 다른 저장파일을 들고오긴 했지만 관객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초창기 실수에 비하면 양반이다. 3시간짜리 영화 상영 내내 대사와 자막이 맞지 않아 패닉상태에 이른 적도 있으니까. 얼마전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자막 담당석에 앉으며, 그는 지난해의 실수를 만회하리라 절치부심했었다. 다행히, 깔끔한 마무리에 모두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자막일을 시작하게 된 건 솔직히 우연에 가까웠다. 한성대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2년동안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에게 96년 개봉된 <쥬라기 공원>은, 구질구질한 삶을 한번에 날려버릴 엄청난 돈방석으로 비쳐졌다. 그동안 틈틈이 모아둔 돈으로 한겨레 영화제작학교에 덜컥 등록을 했고, 그 무렵 현재 부천영화제 기술팀을 이끌고 있는 김시천씨를 만났다. 한동안 그 밑에서 일을 배우던 송미선씨에게 제일 먼저 주어진 기회는 부천영화제의 ‘점찍기’ 아르바이트였다. 자막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뒤 <필름컬처>영화제, 다큐멘터리영화제, 여성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에서 활약하며 ‘퀸 오브 자막’으로 불리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에게 남은 바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자막을 읽으며 그 속에 남모를 땀과 정성이 스며 있음을 한번쯤 떠올려 주는 것이다.
심지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