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이 십자수로 만든 자화상을 선물했더니 나중에 저한테 이메일을 좀 알아봐달라더라고요. 직접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수행 통역원도 톰 크루즈의 꼼꼼한 매너를 칭찬하느라 여념이 없다. 언론도 난리가 났다. 할리우드 스타다운 매너맨이라고.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톰 크루즈는 언제나 그랬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바닐라 스카이> <미션 임파서블> 홍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과거에도 그는 팬들의 사인에 일일이 응대하며 입 찢어지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톰 크루즈는 1월17일 용산 CGV에서의 핸드프린팅 행사와 18일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의 레드카펫 프리미어 행사 등 2박3일의 일정을 소화하고 다음 목적지인 독일로 향했다. 아쉽게도 톰 크루즈는 잡지사들의 개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감독 브라이언 싱어와 각본가이자 제작자 크리스토퍼 매쿼리를 하얏트호텔에서 만났다.
톰은 슈타펜버그와 빼닮았다
<작전명 발키리>의 브라이언 싱어 감독
브라이언 싱어는 1965년생이다. 지난번 <작전명 발키리> 기획기사를 작성하면서야 그걸 깨달았다. 덕분에 ‘젊은’ 혹은 ‘영재’ 운운하는 구절들을 모조리 빼는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오해할 만하다. 변명이 아니다. 싱어의 얼굴은 40대 중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년 같다. 외모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점잖게 자기 영화에 대한 자가 분석을 펼치는 여타 감독들과는 달리 경쾌하고 간결하게 요점만 답하는 것 좀 보라. 혹은, 그냥 피곤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짐 풀자마자 톰 크루즈와 스케이트를 타고(하얏트호텔에는 근사한 아이스링크가 있다), 저녁 늦게까지 칵테일 파티에서 놀았다니까 말이다.
-<작전명 발키리>의 어떤 부분이 당신을 매료시켰나. 나치 독일? 슈타펜버그라는 남자? =슈타펜버그 이야기는 어릴 때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엄마 친척 중 한명이 그때 숙청당했다더라. 그리고 나는 나치 독일 시절에 항상 매력을 느껴왔고 언제나 그 시절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전기영화가 아니라 스릴러여야 한다는 거였다. 내가 자신있는 장르 말이다.
-나에게 이 영화는 당신이 그간 만들어온 슈퍼히어로 영화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음, 맞다. 다른 점이라면 <작전명 발키리>의 모든 것이 실화라는 것. 그런데 한 가지는 영화에 넣지 않았다. 슈타펜버그는 수술 뒤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진통제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모르핀에 중독되는 걸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영화에 넣었다면 관객이 믿지 않으려 들었을 게 틀림없다.
-안 그래도 픽션 같은데 그건 너무 픽션 같으니까! =(웃음) 내 말이. 여하튼 우리는 발키리 작전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게슈타포가 정말로 세부적으로 반역 사건을 조사한 덕분이지. 그래서 리서치는 아주 쉬웠다. (웃음)
-근데 왜 톰 크루즈였나. 지나치게 명백한 선택 아닌가. =그거야 처음부터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가 영화를 만들 예정이었고(톰 크루즈와 UA는 협업관계다-편집자), 또 <미션 임파서블> 1편의 시사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둘이 손잡고 영화 한편 해보자고 약속했었다. 하여튼 <작전명 발키리> 때문에 톰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톰 크루즈와 슈타펜버그는 육체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닮은 데가 많은 사람들이라는 걸 말이다. 슈타펜버그는 떠오르는 스타 장교였고 잘생겼고 한 가정의 아버지였고….
-그가 처음 나치 군복을 입었을 때를 기억하나. =사무실에서 톰이 처음 군복을 입었는데, 알다시피 톰은 어떤 유니폼을 입어도 멋지다. (웃음) 근데 약간 기분이 묘하더라. 나도 재질과 특성을 느껴보려고 톰과 나란히 군복을 입고 서로를 쳐다봤다. 근데 갑자기 톰이 화장실에 가겠다며 사무실을 나서는 거다. 화장실은 복도 바깥에 있었다. 우리는 톰을 멈춰 세웠다. 현대적인 오피스에 누가 나치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걸 보기라도 하면. (웃음)
-당신의 코스튬이나 유니폼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잖나. (웃음) =그렇지. 코스튬을 통해서는 캐릭터의 성격을 잘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근데 우리가 사용한 독일 군복은 한명 한명의 캐릭터를 대변할 수 있도록 대단히 독특하게 재단됐다. 게다가 몇몇 군복은 진짜 2차대전 중에 입었던 것이다. 메르츠 역의 크리스천 베르켈이 입은 것도 진짜 70년 된 옷이다. 구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베이에서도 살 수 있나. =1천달러 정도 할걸. 하지만 그걸 사서 뭐하게. 할로윈 파티에 입고 가나? (웃음)
-종종 슈타펜버그의 육체를 집요하게 묘사하는 부분들이 있다. 어떤 의도였나. =슈타펜버그가 세 손가락과 한쪽 눈으로 모든 일을 해낸다는 걸 관객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그는… 이런 말 하기 좀 그렇긴 하지만… 울버린이다. <엑스맨> 첫 번째 영화를 보면 누가 울버린에게 묻는다. “손에서 칼날이 나오면 아파요?” 그러자 울버린이 대답한다. “매번.” 슈타펜버그도 그렇다. 히틀러를 암살하고 독일과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끝없는 고통과 희생을 치러야만 한다.
-히틀러가 그의 앙투라지(주변 인물)와 모여 있는 그 장면은 정말 기괴했다. 아주 좋아하는 장면이다. =히틀러의 여자친구였던 에바 브라운이 찍은 컬러 홈무비들을 봤고(유튜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편집자), 진짜 히틀러의 보디가드였던 남자와 점심을 먹기도 했다. 그래서 그 별장에서의 히틀러의 삶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슈타펜버그를 만나기 전날 밤 히틀러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했고 다음날도 조금 약에 취한 상태였다. 그것이 당시의 히틀러를 더욱 기괴하고 무시무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바 브라운의 홈무비를 보면… 그는 아이들에게 ‘아돌프 삼촌’이었다. (웃음) 신실한 애견인이기도 했고 말이다.
-이런 말을 하기 정말 조심스럽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나치 독일에 대한 영화나 기록물을 볼 때마다 정말 아름답다고 느끼는 걸 피할 도리가 없다. =당연한 반응 아닌가! 나 역시 그 시절의 광경이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나치 독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스타일화되고 디자인된 정권이었다. 당시 군수장관이자 건축가였던 알버트 슈피어가 지은 제국 건물들과 휴고 보스가 지은 제복들을 보라. 정말 끝내주게 아름답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히틀러의 집이다. 알버트 슈피어의 아름다운 건물 속에 히틀러가 수집한 온갖 키치(Kitch)한 물건이나 가구들이 들어 있다. 아주 괴상하다.
-슈타펜버그의 사적인 열망이나 심리적인 갈등을 거의 설명하지 않는 건 어떤 의도에서였나.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전기영화가 아니라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거다. 슈타펜버그의 개인적인 갈등은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일기장이나 가족들과 만난 순간에 제한하고, 무조건 관객을 쥐어짤 수 있는 서스펜스가 담긴 장르영화로 만들 생각이었다. 컬러도 마찬가지다. 흑백이나 모노톤이 아니라 아주 선명한 느낌을 원했다.
-당신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선과 악이 복잡다단하고 다면적으로 얽혀 있다는 거다.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캐릭터에 심는 데 참 능해 보인다. =특별히 슈퍼맨이 더 그랬지. 나는 이혼 가정에 입양된 외동아들이다(게다가 유대인이고 게이이기도 하다-편집자). 그래서인지 고립된 상황에서 홀로 싸워야 하는 인간들에게 쉬이 매료되는 편이다. 울버린, 슈퍼맨, 슈타펜버그도 그렇고, 내가 제작하는 TV시리즈 <하우스>의 닥터 하우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닥터 하우스 역시 자기 일을 천재적으로 잘해내지만 자신의 작은 세계 속에서는 정말로 외로운 인간이다.
-흠, 그렇다면 당신이 그런 캐릭터들을 만드는 이유는, 그들이 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한 건가. =아… 글쎄. 몇몇 부분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아, 잘 모르겠다. 내가 과연 슈타펜버그 같은 희생을 감내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엑스맨>과 <슈퍼맨> 프로젝트를 이어갈 계획은 있나. =전혀 없다. 흠, 더이상 두 프로젝트에 붙들려 있지 않을 예정이다.
-그럼 다음 프로젝트는 뭔가. =아직은 없다.
-그럼 놀 땐 뭐하나. =미친다. (웃음) 아무것도 안 한다. 책 읽고 영화할 아이디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웃음)
섬세한 디테일에 집중해 보라
<작전명 발키리>의 각본가, 크리스토퍼 매쿼리
크리스토퍼 매쿼리의 가장 큰 타이틀은 ‘브라이언 싱어의 오랜 동업자’다. 그는 싱어의 데뷔작 <퍼블릭 액세스>(1993), <유주얼 서스펙트>(1995)와 <작전명 발키리>의 각본을 썼다. 하지만 싱어의 그늘에서 각본만 생산하는 친구로 매쿼리를 대하는 건 좀 실례다. 그는 2000년에 라이언 필립과 베니치오 델 토로가 나오는 근사한 범죄영화 <웨이 오브 더 건>을 연출한 적도 있다. 듣자하니 <작전명 발키리>의 각본도 직접 감독할 요량으로 썼다고 한다.
-직접 감독까지 할 생각이었다던데. =언제나 내가 감독이라는 전제하에 각본을 쓴다. 더 적절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웃음) <작전명 발키리>의 각본을 쓰면서는 직접 감독하는 게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저마다 만들겠다고 난리칠 만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잖아. 저예산의 작은 영화로 만들 가능성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싱어가 관심을 보였다. 그때 생각했다. 결코 만들어지지 않을 영화의 감독이 될 것인가. 혹은 정말로 커다란 대작의 각본가가 될 것인가. 당연히 후자였다. (웃음)
-싱어가 딱 끌릴 만한 각본이긴 하다. 신체적인 결함을 안은 히어로(영웅)의 이야기니까. =영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게 무척 흥미롭다. 이를테면, 미국인들은 영웅이라는 단어를 아주 가볍게 사용한다. 특히 최근에는 더욱 자주.
-9·11 이후. =그렇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영웅주의는 희생(victimization)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영웅은 ‘영웅적인 희생자’를 일컫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슈타펜버그 대령의 가족들에게 보낸 각본에는 슈타펜버그가 전쟁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데 독일인들은 영웅이라는 단어의 사용 자체를 굉장히 불편해했다. 그들에 따르면 영웅이라는 단어는 파시스트들이 애용하는 말이고 지금도 여전히 파시스트적인 단어라는 것이다. 슈타펜버그는 영웅이 아니라 직업적 책임을 완수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작전명 발키리> 역시 영웅주의가 아니라 책임감에 대한 영화가 된 것이다. 며칠 전 비행기가 뉴욕 허드슨강에 떨어졌을 때 153명의 생존자들이 파일럿을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파일럿은 말했다. 자신은 영웅이 아니라 직업을 완수했을 따름이라고. 슈타펜버그도 그렇다.
-이미 실패가 예정된 작전을 소재로 서스펜스 스릴러의 각본을 쓴다는 건 꽤나 골치 아픈 일이다. =결말을 아는 것이 오히려 이 영화의 중요한 에센스다. 왜냐하면 서스펜스를 더욱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결말을 알수록 캐릭터와 디테일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중점을 기울인 건 기폭장치와 폭탄의 설치처럼 섬세한 디테일들이었다. 한국 관객도 이 영화를 한번 이상 보길 바란다. 볼수록 새로운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싱어와 여러 번 작업했다. 둘의 협업에는 어떤 재미가 있나.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한다. 아주 간단한 단어 하나만 말해도 싱어는 무슨 말인지 다 안다. 슈타펜버그의 부관을 연기한 제이미 파커를 오디션했을 때를 예로 들자면, 약속시간에 너무 늦었던 그는 이미 모든 게 물건너갔다고 낙담하며 오디션장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나와 싱어는 그가 들어오는 순간 서로의 눈빛을 쳐다보자마자 깨달았다. 바로 그라는 걸. 이런 식이다. 오해하거나 헷갈리는 일이 전혀 없다.
-그 유명한 스탠퍼드 감옥실험을 소재로 한 영화를 감독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또한 하비 밀크를 다루는 <카스트로 거리의 시장>도 준비 중 아니었나. =<카스트로 거리의 시장>은 구스 반 산트의 <밀크> 때문에 포기했다. <스탠퍼드 프리즌 익스페리먼트>는 직접 감독할 예정이다. <엑스페리먼트>라는 독일영화와는 달리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사건의 전모를 재현하는 영화가 될 거다.
-각본가가 되기 전에 보디가드와 형사로 일하지 않았나. 그 경험이 각본을 쓸 때 큰 영향을 미치나. =물론이다. (웃음) 명백한 영향을 끼친 건 <유주얼 서스펙트>였다. 보디가드와 형사로 일하다보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거짓말쟁이가 언제나 가장 큰 거짓말쟁이다. 작은 거짓말 하나를 들춰내면 다른 모든 거짓말들이 걸려든다.
-거짓말이라. 그거야말로 각본가들이 하는 일 아닌가. =바로 그렇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