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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
2001-11-20

시사실/꽃섬

■ Story

곧 17살이 되는 혜나(김혜나)는 임신한 사실을 숨기다가 화장실에서 애를 낳아 변기에 흘려보낸다. 그뒤 혜나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 남해로 가는 고속버스에 오르는데 거기서 30대 여인 옥남(서주희)을 만난다.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려고 매춘을 한 옥남은 얼마 전 성관계하던 할아버지가 복상사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때 옥남의 남편은 그녀에게 당분간 집에 들어오지 말라며 얼마간 돈을 쥐어준다. 옥남은 그 돈을 들고 남해에서 배로 2∼3시간 거리에 있다는 꽃섬으로 가려 한다. 그곳에 가면 모든 슬픔과 불행을 잊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둘은 버스 안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나 버스가 눈덮인 산 중턱에 서 있는 걸 깨닫는다. 눈내리는 산 속에서 배트민턴을 치던 버스 운전기사는 버스가 남해로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운전기사는 아버지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서 북쪽으로 떠나고 옥남과 혜나는 눈길을 헤치며 길을 걷는다. 둘은 눈 속에 파묻힌 자동차 한대를 발견한다. 차 안에는 자살하려던 여자가 타고 있었다. 혜나는 자동차 유리를 부수고 그녀를 구해낸다. 그녀의 이름은 유진(임유진). 뮤지컬 가수인 유진은 설암에 걸려 절망적인 상태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것이다. 옥남은 그녀에게 꽃섬에 가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꽃섬을 향한 세 여자의 동행이 시작된다.

■ Review

“여기가 어디지?” 남해로 가는 고속버스에 탔던 두 여자가 눈을 뜨자 창 밖은 온통 새하얗다. 눈내리는 산 속에 처박힌 버스, 운전기사와 덩치 큰 그의 동생은 한가로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남해로 가려던 그녀들은 당황한다. “우리는 남해로 안 가요. 저 산 위로 가거든요.” 운전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안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보인다. 그녀들은 길을 잃고 여기서 <꽃섬>은 앞으로 나갈 방향을 암시한다. 두 여자는 자신들처럼 길에 묻힌 또다른 여자를 데리고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공간으로 향한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불행을 잊게 해준다는 꽃섬, 그런 곳이 있을 리 없지만 이 영화는 믿는다. 아니 간절히 바란다. 영화는 현실에서 꿈으로, 슬픔에서 환희로, 고통에서 초월로 눈보라를 헤치며 나아간다. 영화의 도입부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이다. 흑백화면에 젊은 여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신다면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 노래하겠습니다”라고 결심했던 뮤지컬 가수 유진. 그녀는 “지금 벌받는 거예요”라고 자책하며 눈물을 흘린다. 혀뿌리에 악성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다음은 17살이 되는 소녀 혜나. 화장실 변기에 앉아 애를 낳고 변기에 흘려보낸다.

그순간 소녀는 상상한다. 어깨에서 날개가 솟는다. 그녀는 날 수 있을까? 충격은 얼굴에 저승꽃이 완연한 할아버지가 벌거벗은 채 30대 주부 옥남을 안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할아버지는 복상사를 당하고 옥남은 경찰서에 죄인처럼 앉아 남편을 만난다. “당분간 집에 들어오지 마라.” 남편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다. 더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그녀들은 길을 떠난다. “남해엔 뭐하러 가니?” 옥남의 물음에 혜나는 답한다. “나 낳은 여자 만나러요.” 용서받고 싶은 것일까, 용서하고 싶은 것일까? 어머니를 만나고픈 소녀의 소망은 화장실 하수구로 흘러들어갈 수도 있던 자기 운명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어머니를 만날 수 없다. 남해의 허름한 술집에서 만난 중년 남자는 그녀의 어머니가 오래 전 세상을 떠났다고 일러준다. 어머니를 잃고 소녀는 부둣가에 누워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소리지른다. “나, 태어나서 바다 처음 봐.”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다른 길이 시작된다.

<꽃섬>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인물을 바라보지만 한없이 멀리 있는 이상향으로 향하는 길을 안다. 세 여자가 미지의 공간을 찾아 떠나는 로드무비에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구도를 뛰어넘기 위해 <꽃섬>이 택한 방법은 카메라가 인물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판타지로 완성된 송일곤 감독의 짧은 다큐멘터리 <광대들의 꿈>이 그런 식 인데 그는 이번 영화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가벼운 디지털카메라는 얼굴에 영혼이 담기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꽃섬>은 무엇보다 표정이 좋은 영화이다. 특히 옥남 역을 맡은 서주희는 이 영화가 담고자 하는 모성의 초상을 숭고한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촌스런 말투조차 선한 눈동자에 어린, 깊은 슬픔과 한없는 동정심을 가리지는 못한다. 어머니를 잃은 혜나는 옥남과 만남으로써 안식을 얻는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꽃섬>의 색감은 인물의 표정 위로 비올라와 첼로의 선율이 흘러나올 때 초월적인 느낌까지 전달한다. 세심하게 조율된 소리와 빛과 인물의 얼굴표정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연상하는 이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2년 전 <소풍>이 칸영화제 단편경쟁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받고 올해 <꽃섬>이 베니스영화제 현재의 영화 부문 진출한 데서 입증됐듯 송일곤 감독의 엄격하고 견고한 미학은 훌륭한 예술가의 자질을 보여준다.

<간과 감자>나 <소풍> 같은 단편에서 장편데뷔작 <꽃섬>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순간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는, 화해와 용서와 희망의 이미지를 찍었다. 그의 영화는 거대한 성당에 울리는 파이프오르간과 성가대 합창의 하모니를 떠오르게 한다. <꽃섬>에서도 유진이 <마이 로리>라는 노래를 부를 때 누군가 아프고 지친 어깨를 쓰다듬는 느낌이 들 것이다.

<꽃섬>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다큐멘터리처럼 찍었지만 남해로 가던 버스가 산으로 향할 때나 옥남의 남편이 밴드 활동을 하는 게이로 1인2역을 맡아 등장할 때 영화의 동화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동화답게 그들은 꽃섬에서 천사 친구라고 불리는 여자를 만난다. 이제 마술이 시작된다. ‘하나 둘 셋’ 세상의 모든 슬픔과 불행을 잊게 해준다는 그녀의 주문은 관객을 향한 <꽃섬>의 속삭임이다. 남동철 [email protected]▶ [개봉작] 꽃섬

▶ 부산영화제에서 관객과 만난 <꽃섬> 제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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