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이 글을 기륭전자 파업의 교섭 결과가 확실히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쓰고 있다. 그러나 방금 회사쪽의 무성의한 태도에 대한 항의로 60일 넘게 단식투쟁 중인 기륭의 여성노동자들이 소금과 효소까지 끊기로 했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을 들었다. 불볕더위 아래에서 단식을 한 두명의 여성노동자들은 이미 과거 지율 스님이 80일가량 단식했을 때의 건강상태와 비슷한 수준의, ‘의학적 한계’에 다다랐다는 얘기도 벌써 며칠 전에 나왔다. 시위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혹시나 밤에 무슨 일이 생길까봐 여성 불침번을 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이 상황은 납량특집 프로그램이 아니라 베이징올림픽에 열광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펼쳐지는 2008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2005년,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당시 최저임금보다 딱 10원 더 많은 64만1850원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적은 급여야 알고 들어온 것이니 참으려 했지만, ‘잡담’과 같은 기가 막힌 사유로, 그것도 휴대폰 문자 고지를 통해 수시로 해고당하는 현실은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아프다고 휴가를 내면 해고당할 게 뻔하니까 참고 참으며 일하던 노동자가 119에 실려가면서 곧바로 해고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분노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던 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제조업체의 파견노동자 고용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노동부로부터 확인받았을 때 당연히 그들은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쪽은 불법행위에 대한 약간의 벌금을 납부한 뒤 파견노동자 전원을 해고했다. 그것이 1천일이 넘는 기나긴 파업의 시작이다. 미스터리 중 하나는 어떻게 이들이 이토록 오랜 시간 투쟁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64만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없지도 않았을 텐데, 그동안 그런 직장에서 묵묵히 일해야 했다면 ‘돈’문제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죽는 것 빼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가며 투쟁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인간을 경제적 합리성을 지닌 주체로 보는 경제학의 도그마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싶다는 열망의 발현, 인간은 결코 녹슬면 교체해버리는 기계 부품처럼 취급당하길 원치 않는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외침일 것이다.
기륭전자의 두 번째 미스터리는 이 커다란 외침을 그저 소음으로만 치부해버리는 경영진의 소신있는(?) 태도다. 수백억원 흑자 기업이었던 기륭전자는 지금 수백억원의 적자 기업으로 전락했다.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동행했던 기륭전자 최동렬 회장은 이 사태로 무슨 이익을 본 것일까. 자신의 존엄함 때문이 아니라 남의 존엄함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손실을 감수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한국의 자본가들은 자기들끼리 ‘계’라도 해서 노동자 파업의 손실을 배상(?)해주면서 연대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이 두개의 미스터리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한국사회의 비정규직은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유연화의 경제논리를 넘어 마치 봉건적 신분제를 연상케하는 기업주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잡음없이 매끈하게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문제는 이제 취업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바로 그러한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지하는 데 있다. 어리석게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하는 기륭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방파제다. 그들을 돕지 않는다면 파도는 방파제를 넘어 모두를 덮칠 것이다. 2008년 여름의 진정한 납량특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