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5, 6살 때부터 화투장을 잡았다니까. 밤샘 촬영이 많은데 어리니까 그냥 잔다고. 그러면 제작부장이 촬영 전에 깨워서 돈을 줘. 어른들하고 화투치라고. 그러면서 ‘도리짓고땡’부터 ‘육백’까지 다 배웠어. 나중에 커서 촌지 받은 기자들 틈에 끼여서 고스톱을 친 적이 한번 있는데, 억지로 쳤다가 다 따버린 적도 있어. 나야 미안해서 딴 돈으로 그날 저녁을 샀다고. 근데 얼마 뒤에 보니까 <썬데이 서울>에 기사가 났어. 얌전한 안성기, 알고 보니 진짜 노름꾼이라고. (웃음)” 지난해 겨울 <마이 뉴 파트너> 현장에 갔다가 안성기에게 들었던 옛날 옛적 스토리 중 한 토막이다.
아역배우 1세대인 안성기가 인생이라는 화투판이 다 같은 끗수를 지닌 이들의 공평한 게임이 아님을 슬슬 감지했을 1960년대 중반으로 올라가보자. 여섯살 꼬마 안성기가 <황혼열차>(1957) 타고 데뷔했던 때와 달리 이 시기 아역배우는 충무로의 황금패였다. 1966년 1월 말에 열린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시상식에서도 꼬마 스타들의 파워가 무시 못할 수준이었음이 드러난다. 3천석이 매진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남녀 주연상을 차지한 문정숙과 신영균이 아니라 특별상, 장려상 수상자로 무대에 오른 7명의 아역배우들. 요즘으로 치면 인기상을 코흘리개들이 싹쓸이한 셈이다.
초딩 아이돌 돌풍의 신호탄은 김수용 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였다. 노름꾼 아버지를 둔 소년가장 이윤복의 실화 수기를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는 김천만, 김용연 등 아역배우들을 내세워 서울에서만 28만5천명이라는 엄청난 관객을 끌어모았다. 40년 전 미리 불어닥친 <집으로…> 열풍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실화-아역배우-최루성 신파물이라는 삼각구조의 화학작용이 흥행공식의 하나로 자리잡은 것도 이때부터다. <비무장지대> <날개부인> <생명은 불꽃처럼> <바보> 등 아역배우들이 주연급 배우로 격상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심지어 <이 땅에 저 별빛을>은 무려 20여명의 아역배우들을 기용했다.
경쟁적으로 똘똘한 아역배우 모시기에 나서는 동안 우려도 적지 않았다. 부모의 허영심이“자식을 서커스에 팔아넘겼다”는 원색적인 비난부터 영화 출연 때문에 아역배우들이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며 “배우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영화 출연시켜서는 안 된다”는 논리도 등장했다. “먼지 나는 스튜디오에서 밤샘을 하며 촬영하는 어린이, 새벽부터 끌려나가 추운 들판이나 산에서 뒹굴어야 하는 어린이, ‘아이 우는 것은 그만 좀 했으면’이라고 불평하는 어린이”가 있다면서 교육학자의 말을 인용해 이는 명백한 인권유린이고, 어린이들의 정상적인 발육을 저해하는 혹사 행위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 같은 딴죽이 먹힐 리 없었다. 1966년 3월에 개봉한 이형표 감독의 <심술각하>는 “3살짜리 꼬마가 주연을 했다”고 해서 외려 더 화제가 됐다. 생후 2년7개월 만에 홀아비 일등병의 아들 역할을 맡은 추민호군은 전체 114신 중 2/3가 넘는 장면에 등장하는 어엿한 주연배우. 제작진은 젖병 무는 대신 <동백아가씨>를 흥얼거리고, 세발자전거 대신 트위스트를 췄다는 이 신동이 촬영장에서 차트를 들춰보고, 책상에 오르고, 전화를 거는 척하다, 연필을 내동댕이치고, 권총을 빼드는 긴 장면을 단번에 찍어냈다고 전했다.
하지만 뒤늦게 알려진 제작진의 고충도 만만치 않았다. 웃어라 하면 울고, 울라고 하면 웃고, 오른손 내라고 하면 왼손 냈다는 이 청개구리 배우 때문에 NG컷만 무려 영화 1편을 찍을 수 있는 길이인 8천자. 밤 9시만 되면 쌔근쌔근 잠이 드는 통에 밤샘 촬영 불가요, 춥다고 카메라 앞에 서기를 거부해 인천에서 다시 서울로 귀환한 것만 두 차례요, 게다가 성우를 고용해 후시녹음까지 해야 했으니 애당초 개런티 5만원에 제작비 누수까지 감안하면, A급 배우 못지않은 출연료를 지급한 꼴이었다. 평소 그토록 좋아하는 삶은계란을 우물거리며 세살 꼬마 추군이 촬영현장에서 끝없이 웅얼거린 말은 혹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아니었을까.
참조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