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기네스북을 펴낸다면 <실제상황>(2000)은 여러 부문에서 손꼽힐 영화다. 11명의 조감독이 장면별 연출을 맡고, 35mm 카메라 8대와 디지털카메라 10대를 동원해 만든 김기덕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실제상황>은 독특한 제작방식으로 영화계 안팎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200분 찍어서 100분짜리 영화를 만든다”는 호언은 처음엔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시는 게다가 <쉬리>를 전후로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잇따라 출현하면서 ‘촬영이 몇회차인지’, ‘필름을 얼마나 썼는지’ 너도 나도 뽐내던 때였다. 하루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에 영화 촬영을 뚝딱 끝내겠다는 김기덕 감독의 실험은 “억압돼 있던 (인간의) 공격성과 폭력성이 어떤 계기를 통해 폭발하는 과정을 담겠다”는 미적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그의 초고속 영화 만들기는 보는 이에 따라서는 주류에 대한 도발이기도 했다.
이 같은 ‘특급촬영’ 시도는 더 오랜 과거에도 있었다. 1966년 여름 일간지들은 “사상 최단 시간의 촬영으로 만들어질 극영화”의 출현을 알린다. 이만희 감독의 ‘서스펜스 드릴러’ <지급거래>가 이색 주인공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영화 하나를 찍는 작업 시간이 대작을 빼고는 평균 보름에서 한달 가량인데… (중략)… <지급거래>는 30시간 안으로, 만 이틀이 채 못 되는 시간 안에 카메라 돌리기를 끝내버리겠다는 것이다.” 큰돈을 지닌 여인,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젊은 소매치기, 그리고 우연히 냄새를 맡게 된 베테랑 형사가 경부선 3등 완행열차에 동승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상황이 기본 줄거리. <지급거래>를 쓴 백결 작가는 “이만희 감독이 원래 남이 하는 걸 따르기보다 남이 안 하는 걸 하려고 하는 성향”이라면서 “<지급거래>의 30시간 촬영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소매치기의 삶을 굳이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찍어보자는 뜻이 더 컸다”고 전한다.
당시 이만희 감독이 밝힌 촬영 계획은 비밀작전을 방불케 했다. 아침 6시40분 부산행 103호 열차를 타는 것과 동시에 촬영을 시작한다. 저녁 6시30분 부산 도착까지 쉬지 않고 찍는다. 정차역에서도 필요한 인서트 장면을 촬영한다. 11시간 넘는 이동 뒤에도 곧바로 부산 시내 촬영에 돌입한다. 그리고 이튿날 야간열차 715호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엔딩 부분을 마저 찍는다. <지급거래>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문정숙은 전체 800여컷 중 약 680컷에 등장하지만 정작 대사는 ‘네’라는 대답과 ‘도둑이야!’라는 비명뿐이어서 이 또한 화제가 됐다. 당시 <서울신문>은 “<백치 아다다>의 주역 나애심도 두 마디보다는 훨씬 많은 말을 했다”면서 “문정숙은 99퍼센트 판토마임”이라고 썼다. 한치의 오차라도 발생하면 진행에 차질이 생기므로 제작진은 촬영 1주일 전에 실제 기차를 타고서 헌팅과 동시에 리허설을 진행하고, 촬영 전날까지 모형 기차 세트에서 동선을 맞춰볼 요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특급열차 촬영은 ‘실제상황’으로 골인하지 못했다. “역 주변 소매치기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이만희 감독은 실제 “전과가 있는” 소매치기를 극중 배우로 쓰고 싶어했다. 하지만 ‘불량한’ 성향의 비전문배우를 기용하겠다는 이만희 감독을 정권이 가만둘 리 없었다. 그전에 제작자들과 지방흥행사들이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이 무렵 이만희 감독은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반공영화 <7인의 여포로>(1964)를 만들고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정권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지방흥행사 혹은 다른 전주에게 아부하지 않고서도 연기자의 협조만으로 제작이 가능하다”고 이만희 감독은 장담했고, “사재를 털어서라도 이 감독은 촬영을 시작하고자 했지만(백결)” 결국 <지급거래>는 불발로 끝났다.
그러나 못다 이룬 고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만추>(1966)에 뒤이어 <귀로> 등 수작들을 포함해 무려 11편의 영화를 내놓았던 1967년. 이만희 감독은 “살인사건 혐의를 뒤집어 쓰고서 경부선 야간열차에 올라탄” 한 남자의 곤경을 그린 <기적>을 내놓는데, 백결 작가는 “이 작품의 노 세트(No set), 노 뮤직(No music) 원칙은 <지급거래>의 실험과 연장선상에 있다”면서 “대사나 음악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영화를 끌어가면서 본인의 연출력을 시험해보고 싶어했던 것 같다”고 설명한다. “촌지를 받지 못한 한 기자의 엉뚱한 문제제기”로 인해 <기적>은 극중 인물처럼 개봉 전후 ‘적성국가’였던 폴란드의 <야행열차>를 베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지만, 평단의 반응이나 흥행 성적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많은 영화들처럼 <기적>도 프린트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실험과 도발을 동력삼아 내달렸던 영화기관차 이만희의 궤적을 시나리오만으로 상상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