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선 호러가 별 인기가 없다. 열성으로 따지면야 호러영화 팬이 다른 장르에 결코 뒤지지 않지만, 수적 열세는 부정할 수 없다. 소설쪽은 더 열악해서, 스티븐 킹 같은 불세출의 베스트셀러 작가도 국내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한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올해 나온 <어둠속에 나홀로> 같은 유명 시리즈의 최신편이 거의 반응을 얻지 못한 채로 사라졌고, 할란 엘리슨이나 클라이브 바커 같은 유명 작가들이 참여한 게임 <스크림> <클라이브 바커의 언다잉>도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화이트데이>는 국산 호러 어드벤처다. 지금까지 국산 호러게임이 나온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역시 별 반응을 얻지 못했고, 솔직히 게임 수준도 높지 않았다. 하지만 <화이트데이>는 조금 다르다.
게임 배경은 학교다. 웬일인지 우리나라 학교들은 죄다 무덤을 깎아서, 혹은 병원 영안실 터 위에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계단 밑에는 억울하게 죽은 학생의 다리뼈가 묻혀 있고, 학교에서 목을 매어 죽은 학생의 원혼이 비오는 밤이면 온 학교를 헤매고 다닌다. 학교괴담은 여름 밤 괴담 시리즈 중에서도 최고 유명세다. 하지만 학교괴담의 근원은 화장터가 아니다. 그 인기 비결은 다른 데 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획일화된 권위와 폭력하에서 어둡게 보내는 시스템 자체가 공포의 근원이다. 영화 <여고괴담>에서 그랬듯이, 학교 시스템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공포다.
<화이트데이>는 게임과 게이머를 한데 묶는 공포의 공감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다. 일등 공신은 음악이다. 메인 테마로 사용된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곡 <미궁>은, 메탈음악 등을 끌어들이는 미국 취향의 호러와 구별되는 한국적 공포를 극대화시킨다. 길고 어두운 복도에서 들려오는 스르릉 가야금 소리에,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과 무표정한 수위의 모습에 어렸을 때 봤던 <전설의 고향>에 나오던 머리를 풀어헤친 소복 귀신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겹쳐진다.
게임 화면 왼쪽 아랫단에 심장 아이콘이 있다. 뛰어가면 숨이 찬 듯 심장도 크게 벌렁거린다. 그럴 때면 게이머의 호흡도 가빠진다. 바닥에 쪽지가 한장 떨어져 있다. 주워서 읽으면 벽에서 튀어나오는 여학생 유령 이야기가 쓰여 있다.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 유령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 순간 심장 아이콘이 격렬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게이머 역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냥 아이콘에 불과한데도 현실의 자신이 게임과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이러다보면 역으로 심장 아이콘이 움직이는 걸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등뼈를 타고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오싹한 게 올라온다.
호러 장르의 매력은 아마도 그 치명적인 유혹에 있는 것 같다. 무섭고 겁나지만 그만큼 끌린다. 피투성이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다가간다. 무더운 여름 밤 뻔히 밤에 혼자 화장실 못 갈 걸 알면서도 모여 앉아 괴담에 열을 올린다. 이야기가 하나 끝날 때마다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면서도 앞다퉈 다음 이야기를 재촉한다. 국내에서도 몇년 전 <공포특급>이란 책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호러 장르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건 흔히 얘기하는 정서의 차이 때문인 것 같다. 한복이나 기와집 등 이른바 한국적 소재만 가지고 때우려는 게 아닌, 이 땅에서 태어나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표현하는 게임들이 나온다면, 한국에서 호러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