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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토크] <밤과 낮>, <마츠가네 난사사건>

홍상수 감독의 요즘 영화들이 어느 때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나의 낮은 당신의 밤보다 아름답다님(김혜리 [email protected])이 입장하셨습니다. 마이 엔드리스 나이츠님(이동진 [email protected])이 입장하셨습니다.

김혜리: <밤과 낮>은 세련된 코미디로서도 충분히 즐길 만하죠. 이동진: ‘홍상수의 오디세이가 이타케 섬으로 돌아갔구나’ 싶어서 감격스럽기까지 했어요.

나의 낮은 당신의 밤보다 아름답다 님의 말(이하 낮은): 오늘 선배 대화명은 말하자면 ‘밤과 밤’이네요? ^^

마이 엔드리스 나이츠 님의 말(이하 마이): 요즘 워낙 늦게 자 버릇했더니 때로는 정말 밤만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해요. 가끔 해바라기해줘야 하는데. 그쪽 사정도 비슷하죠?

낮은: 서쪽 나라로 출장가면 시차적응이 필요없죠.

마이: 저는 출장 가서 2∼3일 지나면 거기서도 다시 늦게 잠들기 시작한다는. +_+

낮은: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이 처음 한국을 벗어나 촬영한 작품인데요. 본디 나라마다 ‘가장 프랑스적인 감독’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미국에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일본에는 고바야시 마사히로 하는 식으로. 한국은 그게 홍상수 감독일 텐데 마침 허우샤오시엔도 파리에서 <빨간풍선>을 찍는 바람에 <밤과 낮>은 그런 점에서도 관심사가 됐어요.

마이: 영화 분야에서 프랑스는 때로 지명이 아니라 스타일의 이름이 되기도 하죠.

낮은: 어떤 관객은 <밤과 낮>을 보고 프랑스 도빌을 저렇게 서해 신두리처럼, 파리를 인사동같이 찍었는데 뭐하러 프랑스까지 갔냐며 불평도 하는데, 그건 맞는 지적은 아니죠. ^^ 동시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생의 감각이 이 영화의 주요한 주제니까요.

마이: 맞아요. 파리의 풍광을 찍으러 간 영화가 아니죠. 사실 홍상수 영화에서 여행지는 결코 관광지의 의미가 아니잖아요. 최근 이승우 소설 제목을 인용한다면, ‘그곳이 어디든’에 대한 영화들이니까요.

낮은: 흠, 오히려 시간의 개념에 가까운 공간이랄까요.

마이: <강원도의 힘> 같은 영화가 그나마 여행지 풍광을 가장 많이 다룬 작품일 텐데, 그 영화에서마저도 인물들은 서울에서 하는 짓 그대로를 강원도에 가서 반복하다 오죠. ^^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흥미롭고 경이로웠지만, 이번 영화는 확실히 독특한 지점들이 좀 있죠?

낮은: 홍상수 영화는 언제나 매우 정밀한 구조를 가지고 인간 삶의 반복과 차이를 표현했어요. 그런 설계는 주로 난해함의 표식으로 읽히기도 했지만 실제로 관객이 더듬어 따라갈 수 있는 밧줄이기도 했는데 <밤과 낮>은 그런 표면적 구조를 아예 해체했죠. 주인공 성남(김영호)이 파리에서 보낸 시간이 다 흘러간 다음 서울로 돌아온 결말부에서 꿈 시퀀스들이 마치 암살자의 칼처럼(!) 등 뒤에서 갈비뼈 사이로 슥 들어오면서 영화 전체의 형상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관객은 “이 영화가 대체 어디로 갈까”라는 불안에 흔들리게 되죠.

마이: <밤과 낮>은 작품을 여는 방식부터 달라요. 홍상수 영화는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의미를 최소한으로 부여하는 가벼운 설정숏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테이크의 길이도 짧고, 그 첫숏에 담기는 내용 역시 어딘가로 가고 있는 인물의 모습이라든가 평범한 거리 풍경일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낮은: 어디선가 별 내용도 없는 전화가 걸려온다거나….^_^

마이: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파리 공항에서 담뱃불을 빌린 거지가 느닷없이 “당신 조심해, 조심하라고” 하면서 사라지죠. 이제까지의 가볍게 시작하는 오프닝과 달리, 극 전체에 음울한 기운을 덧씌워주는 신화적 프롤로그 같잖아요. 신전에서 불을 피우며 뭔가 불길한 신탁을 받는 것 같고요. 전작들의 오프닝이 접속사 같았던 데 비해 <밤과 낮>의 첫 장면은 일종의 문장 부사 같은 역할을 하는 듯해 흥미로웠어요.

낮은: 게다가 그에 앞서 김성남이 파리로 도피하게 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사연을 소개하는 자막에 무려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흐르죠. 그 음악은 제게 언제나 장송곡을 연상시킨답니다. ^^ <밤과 낮>이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 비장하고 묵직한 인상을 남기는 면은 확실히 있어요. 임신, 결혼의 정절 같은 일회적 경험을 넘어서는 주제가 등장하죠. 게다가 김영호의 성남은 홍상수 영화의 예전 남자주인공보다 좀더 관습에 순응적이고 육체적으로 존재감이 강한 인물이죠.

마이: 사실 <극장전>부터 홍상수 영화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느껴요. <극장전> <해변의 여인> <밤과 낮>의 남자주인공들은 일종의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데 이건 이전의 인물들에게선 볼 수 없었던 측면이죠. 특히 여성 캐릭터의 면면을 보면 홍상수 감독의 인물들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오! 수정>의 이은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성현아가 연기한 인물과 <극장전>의 엄지원, <해변의 여인>의 고현정 그리고 이번 영화의 박은혜가 연기한 인물들 사이엔 온도차가 역력하잖아요.

낮은: 저는 딱히 작품의 시기에 따라 여성 캐릭터를 구분하진 못하겠어요. <오! 수정>과 <해변의 여인>의 여주인공이 한층 풍부하고 또렷하게 그려진 캐릭터인 건 확실하지만 그 밖의 홍상수 영화에서도 여성 캐릭터가 비하되거나 주체적 의지가 없는 인물은 아니었거든요.

마이: 저도 그런 뜻은 전혀 아니에요. ^^ 혜리씨 표현을 인용하자면, <오! 수정>의 이은주는 또렷한 캐릭터인 건 분명하지만, 풍부한 캐릭터는 아닌 것 같다는 거죠. 그녀는 기본적으로 대상화된 인물이라고 봤어요. 제 말은 <극장전> 이후의 인물들이 남녀 모두 훨씬 더 입체적이고 두터운 인물이라는 지적이에요. 돌이켜보면, 저는 <극장전>이 형식적 측면에서도 분기점을 이뤘다고 생각해요. 그 직전 영화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홍상수 감독 영화 중에서 숏 수가 가장 적은 작품이죠. 카메라 움직임도 극히 제한돼 있고요. 그런데 그 다음 작품 <극장전>부터는 카메라가 줌까지 사용하면서 훨씬 자유롭게 움직이거든요.

낮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숏 수의 문제보다, 기존 홍상수 영화의 대구 형식을 해체한 구조적 모험이었다고 기억해요. <극장전> 이후로는 (물론 여전히 카메라가 삼각대에 붙어 있긴 하지만) 줌이나 패닝으로 카메라를 이동해 영화의 표면 자체를 자유롭게- 중립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형식들이었죠. 프레임을 아예 잊어버리게 만든다고 할까요.

마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플래시백을 처음으로 사용한 홍상수 영화인데, 그 플래시백이 대구의 형식으로 영화에 쓰였죠. 두 남자가 과거를 상상하는 순간과 계기가 공간적으로 일치되고, 상상하는 과거의 숏 수가 각각 3개씩으로 같다는 점도 그래요.

낮은: 다음 작품 <극장전>에서는 영화가 현실에 이음매없이 끼어들었고요. ^^

마이: 그 이전 영화 같으면 그 사이에 암전을 넣었을 텐데, <극장전>에선 그렇게 하지 않았죠. ^^

낮은: 그리고 <밤과 낮>에는 꿈과 밤/낮이라는 같으면서도 다른 시간대가 하나의 평면을 매끈하게 이룹니다.

마이: <밤과 낮>은 아마도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로 대구 구조를 사용하지 않은 첫 영화인 것 같아요.

낮은: 흔히들 홍상수 영화를 에릭 로메르의 세계와 많이 견주잖아요. 비단 파리에서 찍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밤과 낮>을 보면서 로메르 영화 <클레르의 무릎>이 예닐곱번 떠올랐어요. 날짜를 표시하는 일기체로 영화를 쓴 점도 그렇고, 주인공에게 결국 돌아가야 할 아내/약혼녀가 있는데 그녀 없는 공간에 와서 다른 여성에게 매혹되는 것도 그렇죠. 그리고 그 여자는 한명이 아니라 몇명으로 분열되어 있잖아요? 재회한 옛 애인 민선, 파리를 안내해주는 유학생 현주, 그녀의 룸메이트 유정 그리고 유정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에콜 드 보자르의 후배까지…. 로메르의 ‘도덕 이야기’ 시리즈에 등장하는 ‘영화적 할렘’(^^)과 그 어느 때보다 닮았어요.

마이: 그쯤 되면 총체적 유혹이죠. -..-

낮은: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성남이 민박집 계단을 걸레질하는 장면 있잖아요? 성남이 계단을 내려오는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자의 종아리를 올려다보는 그 숏은, <클레르의 무릎>에서 주인공이 사다리에 올라간 소녀의 무릎을 응시하는 장면과 똑 닮았어요.

마이: 아, 그러네요! ^_^

낮은: 좀전에 <밤과 낮>이 가진 중량감을 잠깐 이야기했잖아요. 에릭 로메르가 리얼리스트이자 모럴리스트로 불리는 반면 홍상수 감독은 리얼리스트지만 모럴리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밤과 낮>에서 성남이 죄 짓고 지옥 가느니 죄를 범한 한눈을 뽑고 천국 가는 게 낫다고 설교할 때… ‘앗 이제 모럴리스트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

마이: 성남은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여자를 돌려보낸 홍상수 영화 속 첫 남자죠.^^

낮은: 달력에 표시해놓아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밤과 낮>은 세련된 코미디로서도 충분히 즐길 만하죠.

마이: 이 영화가 홍상수 감독 영화 중 가장 어두운 작품이라는 견해가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동철 편집장과 허문영 선배가 그런 취지의 글을 쓰셨던데.

낮은: 결국은 출구없는 세계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섬뜩함을 준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홍상수 감독이 이 영화가 그리는 진실에 대해서 특별히 비관적인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저 사실이 그러할 따름이라는 거죠. 홍 감독의 전작도 지식인을 풍자하고 비웃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태가 그렇다는 걸 조금은 귀여워하고 슬퍼하며 그렸을 뿐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요.

마이: 저도 이 영화가 가장 비관적인 홍상수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오히려 반대로 봤어요. 홍상수 감독의 주인공은 언제나 오디세이적이었는데,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끝났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큰 변화라는 거죠. 저는 ‘마침내 홍상수의 오디세이가 이타케 섬으로 돌아갔구나’ 싶어서 감격스러운 측면까지 있었어요.

낮은: 하지만 성남의 귀가가 섬뜩한 폐소공포증을 자아내는 것은 사실이죠.

마이: 주인공의 귀가가 특히 기괴한 꿈장면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사실 귀가로 깨끗이 해결된 것도 없고요.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말 그대로 뽀송뽀송한 해피 엔딩이 나올 리는 만무한 거잖아요? 그걸 전제한다면, 전 이 영화의 엔딩은 적어도 절반의 해피 엔딩은 된다고 봐요. 그 꿈 장면은 나머지 절반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담고 있는 부분이고요. 단적으로 저는 <밤과 낮>의 종반보다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엔딩이 훨씬 더 암울하다고 봤어요.

낮은: <밤과 낮>은 무엇보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해도 실제로는 다른 시간대를 살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밤과 낮>의 마지막에 성남의 아내가 “이제 우리 헤어지지 말자, 다신 그런 꿈 꾸지 말라”고 말하지만 우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죠. 그 사실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면 <밤과 낮>은 매우 슬픈 영화가 되겠지요. 그러고보면 <밤과 낮>에는 반복되는 카메라 움직임이 있어요. A, B라는 두 인물 혹은 두 피사체가 한 프레임에 담겼다가 둘 중 하나가 프레임 밖으로 이동해요. 그러면 카메라는 이동한 대상을 따라 패닝했다가 멈추어 있는 인물/피사체로 돌아오곤 하죠. 예를 들어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은 성남의 서울행 비행기가 이륙하는 숏에서도 카메라는 비행기를 따라갔다가 다시 활주로의 풀밭으로 돌아왔던 걸로 기억해요. 그럴 때마다 객석의 저는 A와 B 중 움직인 B를 따라가서 그의 시간을 잠시 공유했다가, 카메라가 A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시간은 나름대로 여전히 이쪽에서 흐르고 있음을 깨닫곤 했습니다.

마이: 관계에 대한 근본적 절망은 홍상수 감독이 그린 모든 남녀관계가 그랬으니 <밤과 낮>만의 특성으로 볼 순 없을 거예요. 홍상수 감독의 필생의 테마는 통념이나 위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이 작품 ‘역시’ 이전과 궤를 같이하는 거라고 보죠.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도 해요. <밤과 낮>이 홍상수 감독의 ‘상대적으로’ 슬픈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두운 영화는 아니라는 거죠. 슬픈 것과 어두운 것은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밤과 낮>에서는 홍상수의 인물들이 죄책감도 느끼고 자기 연민도 느끼고 심지어 뉘우치기까지 하는데, 이건 홍 감독의 첫 다섯 작품까진 거의 볼 수 없었던 면모죠. 그런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랄까, 연민이랄까, 이런 게 분명히 요즘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는 있는데, 그건 그 영화를 오히려 밝게 만드는 요소일 수 있다는 거죠. 다른 한편으론 슬프게 만들지언정 말이에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슬프지 않고 어두운 영화이고, <어톤먼트>는 어둡지 않고 슬픈 영화라는 견지에서 드린 말입니다. 자성이 있고 그에 대한 연민이 있다면, 그건 덜 어두운 영화예요.

낮은: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홍상수 감독의 인물이나 그들이 하는 말에는 상대적으로 덜 무게를 두는 편이에요. 다만 홍상수가 탁월하게 모사하는 현실 속에 감정이 점점 더 많이 침투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해요. <해변의 여인>은 제가 보면서 처음 울었던 홍상수 영화고 이번 영화 역시 그랬으니까요.

마이: 아, 그랬군요! 전 운 적은 없지만(-.-) 홍상수 감독의 요즘 영화들이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낮은: 홍상수 영화는 그 총합이 한편의 기나긴 영화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가장 놀라운 점은 이미 그가 올라선 차원 안에서도 매번-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대해선 유보적이지만- 새 영화가 더욱 훌륭하고 정교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밤과 낮>은 홍상수 영화 중에서 가장 사실적인 작품이라 불러도 좋을 겁니다. 여기서 사실적이란 스타일의 유파가 아니라 현실 모사의 세련됨을 가리키는 개념에 가까운데요. 왜 입체파 화가들을 말할 때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우리의 시지각은 눈이 받아들인 정보를 뇌가 종합한 거지 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즉, 현실을 날것의 현실 그대로 그리면 초현실적으로 보인다는 거죠. 그건 영화에도 적용될 거예요. 다시 말해 현실의 시간을 가장 현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형식이 필요하지 그냥 찍는다고 현실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주체로서 인간이 받아들이는 현실의 시간은 일관성없는 의식과 욕망의 불연속면인데, 홍상수 감독은 영화로 그 현실을 모사하는 ‘옳은’ 방법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발명했고 그 길 위에서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마이: 맞용. 예전에 제가 인용했듯,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라는 거죠.

낮은: 엥, 맞용? 귀여운 오타! ^0^

마이: 적어도 홍상수 감독 영화를 말할 때 그 귀엽다는 형용사는 최상의 찬사가 된답니다. ^^ 그런데 <밤과 낮>의 마지막 꿈장면을 보면서 저는 <강원도의 힘>의 물고기신이 떠올랐어요. 그 영화에선 산속에서 지숙이가 살아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발견하고 묻어주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상권이 대야에 담긴 물고기 한 마리를 바라보면서 영화가 끝나고요. 원래 그 대야에 담긴 물고기는 두 마리였잖아요? 전 그때도 그 장면을 보면서, 물고기는 일종의 태아에 대한 상징이라고 읽었어요. 낙태한 지숙은 ‘상징적으로’ 아직 살아 있는 물고기를 묻어주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고, 상권은 지숙이 낳았으면 아이가 둘일 수도 있었는데(실제 부인과의 아이 하나를 포함해서), 그렇게 지숙이 낙태를 함으로써 하나만 남은 물고기를 기묘한 심정으로 지켜보게 되었다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밤과 낮>의 도자기 역시 태아의 상징이라는 거죠. 가짜로 임신된 태아와 중절한 태아와 중절될 태아 그 모두에 대한 불안감과 죄책감을 포함한 상징물이라고 할까요. 물론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의 꿈이 이런 특정한 해석을 요구하는 명확한 은유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게 읽어내면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낮은: 꿈의 시퀀스를 포함해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영화 <밤과 낮>에는 세번의 괴이한 이미지가 있어요. 성남이 우연히 맞닥뜨리는 파리 영화 촬영현장과 서울로 떠나는 공항 안의 어린 새, 그리고 성남이 파리에서 서울로 떠나는 비행기 이륙장면을 찍은 활주로 숏이었어요. 비행기 이륙숏은 매우 관습적인 연결숏인데 이런 브리지를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본 기억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 숏을 기점으로 파리의 시간대는 문을 닫고 밤과 낮의 표면적 시간대가 합쳐지는 장면이기도 하죠.

마이:홍상수 감독의 팬으로서, 개봉날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텅텅 빈 객석을 보니 정말 마음 아프긴 하더라고요.

낮은: 저 역시 소수의 관객과 더불어 <밤과 낮>을 봤어요.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 줄이 사라질 때까지 모두 앉아 있더군요.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내려오면서 “굴이나 같이 먹으러 가실까요?” 하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답니다.

마이: 아님 팔씨름이라도 한판 하시든가. ^^

이동진: <마츠가네 난사사건>은 이마무라 쇼헤이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았어요. 이마무라의 충실한 조감독이 절치부심 데뷔하면서 만든 영화를 보는 것 같았죠. ^^ 김혜리: 주인공 고타로가 실체를 본 적도 없는 쥐를 없애기 위해 수도국을 찾아갈 때는 이 영화가 현실적으로는 토해내선 안 되는데도 견딜 수 없는 오심을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낮은: <밤과 낮>의 꿈 시퀀스에는 돼지가 잠시 등장하는데 <마츠가네 난사사건>은 멧돼지 전설을 가진 가상의 일본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린다 린다 린다>로 국내 관객에게 알려진 야마시타 노부히로가 연출했습니다. 야마시타 감독의 최신작인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을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보고 제가 호들갑을 떤 적이 있잖아요? ^.~ 사랑스럽다고….

마이: 생생합니다.^0^

낮은: 저로선 야마시타 노부히로 영화를 본 것이 그 두편뿐이라 <마츠가네 난사사건>을 보러가면서도 <…산들바람>답거나 <린다 린다 린다>스러운 걸 기대했는데 둔기로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마이: 저도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영화는 <린다 린다 린다>와 <후나키를 기다리며> 딱 두편을 봤는데, 이 영화는 그 두 작품의 인상과 판이하더군요. +_+ 물론 공간이 시골이고 리듬이 독특하다는 점은 비슷하지만요.

낮은: 그나마 일관성을 찾는다면 저온 숙성된 블랙유머 정도? ^.~ 극중 마을 남자들은 단체로 성적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고, 도입부는 심지어 죽은 여인의 음부를 더듬는 초등학생 소년이죠.

마이: 그 장면은 위악적인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느낌이 있긴 했어요. -.-

낮은: 나중에 부검을 하려다가 문제의 여자가 살아나자 “시체가 부활하다니 재밌는 이야기의 시작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대사가 나오는데요. 이게 마치 <마츠가네 난사사건> 자신에 대한 코멘트 같죠. -_-# 정체 모를 금괴를 찾아 이 마을에 온 외지인 커플과 마을의 창녀 노릇을 하는 처녀 하루코의 임신을 둘러싸고 줄거리가 흘러가지만 잘잘못을 따지고 싶은 의욕은 별로 불러일으키지 않는 영화예요. -..-

마이: <마츠가네 난사사건>은 제게 야마시타의 전작들보다는, 오히려 이마무라 쇼헤이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더 많았어요. 이마무라의 충실한 조감독이 절치부심 데뷔하면서 만든 영화를 보는 것 같았죠. ^^ 어두운 욕망이 스멀스멀대는 마을의 이야기라는 뼈대부터 세부 묘사까지 그래요. 조금 위악적인 면들도 그렇고요. 게다가 이마무라 영화에선 <돼지와 군함>부터 <간장선생>까지, 창녀 캐릭터가 참 많이 나오잖아요? 게다가 <인류학 입문>에선 모녀를 함께 범하는 남자가 나오고요. 모티브나 캐릭터부터 구체적인 묘사까지, 이마무라와의 연계점이 자주 발견됐어요. 심지어 <돼지와 군함>의 매춘부 이름도 역시 이 영화처럼 하루코였죠. ^^ 그래도 이마무라 영화보다는 윤리적인 시선이 들어 있는 영화 같아요. 이마무라는 그걸 초월한 생명력 같은 걸 다루는데, 주제를 다루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좀더 관습적인 느낌이 있어요. 이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이 이마무라의 작품들에서와 비교하면 좀 납작하기도 하고요.

낮은: 눈으로 뒤덮인 마을의 배경이나 잘린 신체 일부가 굴러다니는 걸 보면 코언 형제의 <파고> 생각도 나지만 범인 잡겠다는 의지는 없다시피 하니까요. -_- 결말에 이르러 경찰인 주인공 고타로가 실체를 본 적도 없는 쥐를 없애기 위해 수도에 약을 풀겠다고 수도국을 찾아갈 때는 이 영화가 현실적으로는 토해내선 안 되는데도 견딜 수 없는 오심을 묘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이: 그 구토엔 일종의 자기 모멸의 감정 내지는 자멸의 충동 같은 것까지 담겨 있죠.

낮은: 영화 자체가 일종의 난사(亂射)인 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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