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정착의 뿌리에서 잘려나간 상처받은 인물들이 기억에서 치유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오야마 신지가 만든 이 무기력한 매혹의 공간엔 희망이 없고 절망도 없다. 자잘하게 지속되는 현실이 그저 있을 뿐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전망없이 떠돌던 아오야마 신지의 인물들이 일종의 정박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징후가 <새드 배케이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밀항에 관계하던 켄지(아사노 다다노부)는 부모를 잃은 중국 소년 아춘을 데리고 도망쳐 그를 보살핀다. 켄지는 어린 시절 도망간 어머니와 자살한 아버지로 인한 상처를 안고 있고, 게다가 그가 돌보는 유리(쓰지 가오리)는 10년 전 6명을 살인하고 자살한 친구 야스오의 정신병을 앓는 여동생으로 아직 오빠가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 대리운전을 하며 아춘을 돌보던 켄지는 우연히 마미야 운송회사라는 작은 회사의 사장을 태우고 가다 그 사장의 아내가 된 어머니를 발견한다. 이곳저곳 뜨내기로 사는 부초 같은 사람들의 삶을 잠시 묶어주고 그들을 위해 따뜻한 배려를 하는 이곳 마미야 운송에는 오래전 버스납치사고의 상처를 지닌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나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염세 청년 고토(오다기리 조) 등이 모여 산다.
영화는 10년 전(<헬프리스>(1996)의 사건)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시작하고, 카메라는 부감숏으로 항구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헬프리스>에서 시작된 인물들의 방황의 구도는 그대로 이어진다. 거기에 <유레카>(2001)에서 버스납치사건의 당사자 코즈에도 소환된다. 파탄과 절망의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카메라는 유연하고 연민이 없으며 무심한 관조주의를 견지한다.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유목민적 삶의 모습에 관심을 두던 감독 아오야마 신지의 주제의식도 지속된다. 이 영화는 아오야마 신지가 보여주는 일본사회에 만연된 죽음의식에 대한 애도 기간이 만료되었음을 암시한다. 켄지와 유리는 <헬프리스>가 보여주었던 파탄의 증인들이었고, 코즈에는 <유레카>에서 충격적 사건을 겪은 당사자로 이들 모두가 일종의 고아의식을 지니고 있다. 아오야마 신지의 전작들이 일본에 만연된 죽음과 출구 없음의 감각을 인과관계 없는 우발적 파탄들의 장면으로 구성했다면, <새드 배케이션>은 탄의 증인들의 삶이 어떻게 지속되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해간다.
<밝은 미래>의 구로사와 기요시와 함께 <헬프리스>로 깊은 인상을 각인시키며 등장한 아오야마 신지는 1990년대 젊은 일본영화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릿쿄대학에서 함께 영화동호회를 했던 두 감독은 이후 일본의 젊은 대안영화와 장르영화에서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며 역량을 보여주게 된다. 아사노 다다노부와 미야자키 아오이는 아오야마의 영화와 함께 성숙하는 배우들이다. 또한 아사노 다다노부와 오다기리 조의 출연은 10년 전 <밝은 미래>가 보여준 우울한 청춘의 현재적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적 상황을 연출한다.
영화 <새드 배케이션>은 아오야마 신지의 현재를 확인하게 해주는 터닝 포인트 같은 작품이다. 흐느끼듯 노래하는 주제곡은 ‘미안하다’는 말을 통해 속죄의 제의를 수행한다. 이제는 서서히 죽음에서 빠져나올 때, 하지만 영화는 대책없는 긍정이나 희망으로 쉽게 선회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정처없는 헛헛한 인물들이 서로의 운명에 개입하며 파탄을 지속하지만, 여기엔 분명히 정박에 대한 암시가 있다. 불가해할 정도로 명랑한 어머니가 있고, 켄지의 불행을 감싸안아주며 그의 아이를 뱃속에 키우고 있는 여자가 있으며, 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유리가 있다. 무중력, 무기력의 공간들을 전전하던 인물들을 감싸안아주는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커다란 비눗방울은 거대한 유방처럼 부드럽고 관대하다. 분명 애도는 끝나고 있다. 우연으로 엮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리좀과도 같은 우발적이고도 새로운 관계는 그의 영화가 끊임없이 부정하고 살해해온 부모세대들에 대한 적의를 점차 지워가고 있다. 복수는 만료되고, 파탄은 정점에 이루었으니,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