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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토크] “침묵과 망각에 저항하고 싶어하는 의지가 담긴 영화예요”

불망기(不忘記)님(김혜리 [email protected])이 입장하셨습니다. 물망가(勿忘歌)님(이동진 [email protected])이 입장하셨습니다.

김혜리 “삶의 유일한 희망이 곧 가장 흉측한 흉터이기도 한 모순의 이야기예요.” 이동진 “<그르바비차>는 감독의 국적과 성별이 중요한 영화죠.”

불망기님의 말(이하 불망기): 어느덧 저희들이 ‘굿 나잇 2007 굿 럭 2008’ 인사를 드려야 하는 주네요. *.* 새해부터는 격주로 뵙겠습니다. 아직은 송년회와 망년회가 이어지는 나날인데요. 우연인지 이번주에 다룰 영화들은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기억하려는 안간힘에 관한 영화가 많네요. ^^

물망가님의 말(이하 물망가): 요즘 망년회 대신 송년회라는 용어를 쓰려는 경향이지만 저는 솔직히 망년회라는 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한해가 가면 잊고 싶은 일들이 먼저 떠오르지 않나요? 그걸 음주든 가무든 수다든 한바탕 살풀이로 잊는 의식을 치르는 건 나쁠 게 없죠.

불망기: 그렇게 한다고 잊혀지기만 한다면야! 현실은 그러긴커녕 음주가무 끝에 잊고픈 일을 연말에 몰아서 추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잖아요. -.-

물망가: 헐헐. 맨정신으로 너무 많은 것을 보신 게야…. -_-#

불망기: 자, 오늘은 <그르바비차>와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두편의 동유럽영화와 지난주 개봉한 한국영화 <헨젤과 그레텔>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망가: 세 영화 내용을 한꺼번에 요약하자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라고 할 수 있겠네요. ^^ <그르바비차>는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첫 장면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화였어요.

불망기: 내전에서 세르비아계가 저지른 만행으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보스니아 여성들이 명상 치료를 받으며 몸을 겹치고 누워 있는 이미지였죠.

물망가: 카메라가 눈을 감은 채 눕거나 앉아 있는 여자들을 옆으로 이동하며 보여주죠. 그러다 한 여자 얼굴에 카메라가 멈추면 그녀, 주인공 에스마(미르야나 카라노비치)가 눈을 뜨고 정면으로 카메라를 바라봅니다. 그 장면에는 침묵을 강요하고 눈을 감게 하는 상황과 망각에 저항하고 싶어하는 감독의 의지가 그대로 담겨 있죠.

불망기: 약간은 지나치게 노골적으로요. ^^

물망가: 솔직히 상당히 노골적인 영화죠. 메시지를 위해서 모든 것을 집중시킨 영화랄까요.

불망기: 말씀하신 첫 장면은 움직임이 없어서인지 니콜라 푸생이 그린 <사비니 여인의 약탈>이라는 그림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했어요. 사실 로마인과 사비니인들 사이에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사건도 <그르바비차>가 다루고 있는 여성들의 비극과 비슷하죠.

물망가: 제 기대만큼 흥미로운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너무 직접적이고 목적지향적이라는 느낌 때문에요. 하지만 망각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영화가 약자의 손에 있을 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많은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예를 들어 아르메니아계 캐나다인인 아톰 에고이얀이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역사를 고발한 <아라라트>를 만든다든지, 쿠르드족 출신 바흐만 고바디가 이란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의 비참한 상황을 고발한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만든다든지 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분명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불망기: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시선의 주체라는 문제가 있죠.

물망가: 어떤 영화는 그 영화를 누가 만들었느냐가 중요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르바비차>가 그런 예라고 봤어요. 감독의 국적과 성별이 중요한 영화죠.

불망기: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는 주체 외에 시제도 중요한데요. 사태의 심장부로 뛰어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그 낙진과 여파를 묘사하는 영화도 있지요. <그르바비차>는 후자고요. 전쟁의 총소리는 멈추어 일상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아직 사람들 가슴속의 전쟁은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상태죠. 실제로 영화 속의 사라예보는 어디 땅을 파면 갑자기 집단 매장된 시체들이 나와서 실종된 가족을 확인하러 달려가야 하는 도시예요. 풍경 자체가 은유였어요. 십대들이 폭격 맞은 흉측한 건물 잔해에서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는 장면도 그랬고요. -_-

물망가: 그런 것들을 포함해서 이 영화가 좋았던 첫 번째 이유를 꼽는다면, 플래시백이 없다는 점이었어요. 사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끔찍한 과거의 사연이 있을 거라는 게 암시되는데(그게 어떤 비극인지도 초반에 추론할 수 있죠), 영화는 끝까지 문제의 그 비극을 직접적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지 않더군요. 그저 고백적인 대사로만 처리하는데, 그게 참 마음에 들었어요. 이 영화가 주장하는 메시지를 다루는 감독으로서 옳은 자세였다는 판단도 들었고요.

불망기: 그건 이 영화의 본질과 관련해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이 내려야 했던 핵심 선택 중 하나였을 거예요. 영화의 역사 재현방식에 관해 이 코너에서 이야기한 적 있지만 “그것은, 도저히, 찍을 수 없다”는 원칙적 태도일 수 있겠죠.

물망가: “찍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쪽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요?

불망기: 아마도요. ^^ 비록 ‘그 일’을 보여주지는 않았으나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것 위에 과거가 끊임없이 드리워져 있어서 흡사 목격한 기분이 듭니다.

물망가: 그러나 <그르바비차>가 풍부한 영화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비교하자면 딸의 수학여행 비용 때문에 에스마가 분투하는 이야기를 드러난 줄거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르바비차>는 켄 로치의 <레이닝 스톤>- 딸의 견진 드레스 마련을 위해 아빠가 동분서주하는- 과 이야기 형태가 비슷한데요. 그 영화에 비해 <그르바비차>는 조금 앙상해 보이거든요. 모녀가 장난을 치다가 딸이 찍어누르자 어머니가 갑자기 정색하고 밀쳐낸다거나, 가슴에 털이 난 남자가 버스에서 다가오자 갑자기 내린다거나 하는 초반의 복선은 너무 직접적이라는 느낌도 있죠.

불망기: 음, 성폭행 당한 여성 입장에서 남성 일반에 대한 강렬한 생리적 공포감은 자연스러운 반응이긴 해요. 그런 점에서 에스마가 술집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남성의 접근에 마음을 여는 과정이 오히려 좀 수월하게 묘사되지 않았나 봅니다. 복선은 확실히 뻔하지만 이 영화는 거의 마지막 15분에 이르러서야 비밀을 밝히잖아요? 서사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부담을 짊어진 선택이니, 그런 복선을 극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는 보완책으로 썼겠죠.

물망가: 하지만 이 영화의 복선은 직접성 못지않게 그 많은 장면 수 때문에라도 잉여로 보여요. 강렬한 메시지를 강력하게 던져준다는 점에선 분명 성공적이지만, 한편의 영화나 캐릭터들을 위해 이야기의 양감이나 질감을 도드라지게 만들어야 할 부분에선 아쉬움이 좀 있어요. 예를 들어서 모녀의 이야기는 강렬하지만 두 여자 각각의 연애담은 빈약해요. 시간상 꽤 많은 비중인데도 말이에요. 특히 마지막에 두 모녀가 각각의 남자와 나누는 키스는 이야기 자체의 매듭을 덮고 가려는 미봉책으로 보였어요. 일종의 시각적 퍼포먼스 같다고 할까요.

불망기: 하지만 모녀 어느 쪽의 연애도 행복한 전개를 확신할 정도는 아니던데요. ^^ 저는 <그르바비차>를 보면서 무엇보다 ‘모순’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에스마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삶의 유일하고도 가장 강한 희망이 곧 가장 흉측한 흉터이기도 한 기막힌 모순의 이야기잖아요. 인생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동시에 차마 볼 수 없는 메두사의 머리 같은 존재인 셈인데, 에휴.-_-

물망가: 딸의 존재가 그렇죠.

불망기: 솔직히 딸 사라가 가끔 거칠게 굴면 에스마의 눈빛이 흔들리잖아요? 때로는 과민한 대응을 하기도 하고요.

물망가: 심지어 때리는 장면도 자주 나오죠.

불망기: 인간이니만큼 딸에게 순간적으로 원한을 투사하는 일이 당연히 있겠죠? 저조차도 영화를 보며 자꾸 사라의 모습에서 폭력성을 무의식적으로 읽어내며 흠칫 놀라게 되더라고요. 그래 놓고는 또 어린아이에게 그런 연상을 보는 자신을 다시 꾸짖고요. 관객의 이런 갈등이 곧 에스마의 마음이기도 하겠죠.

물망가: 에스마가 술집 주인에게 주먹질을 당하자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남자가 완력으로 보스를 때려눕히는데 여기에 대한 에스마의 반응이 아주 인상 깊었어요. 일반적으로는 그 상황에서 그 남자는 ‘백마 탄 왕자님’일 텐데, 에스마는 그걸 보고 “당신들은 전부 짐승들이에요”라면서 화를 내며 혼자 나가죠. 에스마에겐 ‘좋은 폭력’도 ‘나쁜 폭력’과 큰 차이가 없을 거예요. 폭력에 의한 거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여성으로서 말입니다.

불망기: 남성의 육체에 대한 독한 혐오감을 안고 사는 여성이 성적 추근거림이 예사롭게 행해지는 술집에서 일을 한다는 점도 인상적인 설정이었습니다. “산 사람은 어찌하든 살아야 한다”는 명제의 절박성이 피부에 와닿았어요.

물망가: 돈을 구하려고 민망함을 감추고 친구, 친척, 보스에게 손을 벌리는 장면들도 그랬어요.

불망기: 에스마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영화의 여자 같죠? 겪을 만큼 겪어서 허튼 기대가 없으면서도 계속 사랑을 하고 점점 질겨지는 여자요. 영화의 주제와 호흡이 어딘가 이창동 감독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했어요.

물망가: 그런가요? 저는 너무 밭은 호흡이라고 생각했는데. -.-

불망기: 미묘한 음정으로 이야기를 맺는 방식이 그런 연상을 일으켰나 봐요. 딱히 희망도 절망도 아닌, 길고 괴로운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는구나 하는 기분이었거든요.

물망가: 흠, 전 이 영화의 라스트신이 좀 관습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딱 그렇게 끝날 것 같은데 꼭 그렇게 끝나잖아요. 전 모녀 화해의 암시로 봤는데, 다르게 보셨나요?

불망기: 글쎄요. 갑자기 사려 깊지 못한 방식으로 엄마가 딸에게 오랫동안 감췄던 비밀을 터뜨린 다음, 둘이 말로 풀지 못한 채 딸이 수학여행을 가는 장면인데요.

물망가: 그래도 차에 오른 뒤 서로 말없이 주고받는 눈빛과 손짓으로 천 마디 말을 대신하는 거 아닐까요. ^^ 게다가 버스 안에서 아이가 부르는 노래도 굳이 <사라예보 내 사랑>이죠. 완전한 화해는 아니었지만 화해의 상징일 수 있다는 거죠.

불망기: 소녀는 순간적으로 엄마를 속상한 채 두고 떠나기 싫어서 그런 마음을 눈길로 표현한 거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녀가 갈등없이 지내리라고 믿을 사람은 없잖아요. 앞으로 사춘기를 통과하고 오랜 세월 동안 엄마와의 사이에서 힘든 일이 점점 더 많겠지, 하는 심정으로 봤답니다.

물망가: 갈등이 물론 지속되겠지만, 어려운 고비를 두 모녀가 한 단계 넘었다는 정도의 안도감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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