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양이에 대한 전통적인 편견(차갑고 배은망덕한 동물이라는) 때문이라기보다 ‘동물을 애완하는 일’에 대한 내 혐오 때문이다. 이를테면, 수캐의 ‘불필요한’ 성기를 거세하고선 ‘가족처럼’ 사랑해주는 식의 빌어먹을 ‘애완’ 말이다. 가족나들이의 최적지라는 동물원이라는 곳도 동물 처지에선 참으로 끔찍한 것이고, 하여튼 동물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애완’할 게 아니라 그들의 방식대로 살게 둘 일이다(동물을 사랑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은 지구의 재앙이며, 인간이 없다면 지구의 문제도 없다).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오늘 두 고양이에 호감을 갖게 된다. 웹에 사는 고양이 ‘스노우캣’과 스크린 속의 고양이 <고양이를 부탁해>다. 지난해 초 스노우캣 웹사이트(www.snowcat.co.kr)에 들어가자 이내 나는 손 그림과 디지털 그림이 묘하게 조화된, 그 흑과 백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세상의 속도나 리듬과 무관하게 제 세상을 구성하는 고양이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라는 내 질문을 그리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떤 이는 그러더라. “좌파가 왜 그런 걸 좋아한대.”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 고양이는 현실에 대해 좌파 이상으로 급진적이다. 단지 스타일이 다를 뿐(흔히 좌파들은 급진성을 그들이 공인한 급진성의 ‘스타일’과 등치하곤 한다). 사람들이 “왜 사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좌파들이 “이 더러운 세상!”이라 말할 때, 그 고양이는 그저 “혼자 논”다.
스크린 속의 고양이를 만난 건 어제다. 내가 사는 일산에선 이미 내렸기에, 나는 그 고양이를 만나러 강남역 근처까지 가야 했다. 영화는 ‘시사회에서 안 보길 얼마나 잘했는가 싶을 만치’ 좋았다(‘전문가들’은 불행하다. 영화를 시사회에서만 보는, 결국 한편의 영화와도 뜨겁게 조우하지 못하는 그들은 참으로 불행하다). <고양이…>는 마치 홍상수 영화처럼 현실의 디테일에 세심하면서도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미소를 머금게 할 만치 편안하다. 30대 이상 남성 인텔리들의 현실(위선을 빼고 나면 터럭 한개라도 남을까. 결국 영화는 ‘풍자적 긴장’을 이루고 관객은 불편해진다)과 스무살짜리 여상졸업생들의 현실(위선의 근거나 자격조차 없는, “저부가가치”한)의 차이일 게다.
그 편안함은 바로 <고양이…>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스무살짜리 여상졸업생들의 현실에 세심한 <고양이…>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 말이다. 사람들은 영화에서 ‘현실’이 아니라 ‘현실과 닮은 꿈’을 바란다. 그들의 ‘현실’은 백이면 백 “저부가가치”하며 그들은 “저부가가치”한 그들의 ‘현실’을 영화 속에서 재확인하려 들지 않는다(<친구>보다 나은 <파이란>이 실패한 이유도 그 영화에 가득한 ‘현실’ 때문이다. 흥행을 바랐다면 <친구>처럼 ‘현실’이 아니라 ‘현실과 닮은 꿈’이어야 했다). ‘현실과 닮은 꿈’은 오늘 한국자본주의가 제시하는 ‘꿈’과 관련한 것이다. 개미처럼 일해서 밝은 내일을 도모한다는 개발독재 시절의 ‘꿈’이 폐기되고, 주식이니 벤처니 온 나라가 투전판이 된 오늘 한국자본주의가 제시하는 ‘꿈’ 말이다. 사람들은 그 꿈이 그저 꿈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저부가가치”한 제 ‘현실’을 수긍하는 일은 더욱 끔찍하기에 늘 ‘꿈’을 택한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현실’에 의문(선의와 성실함을 가진 내가 대체 왜 이렇게 “저부가가치”하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을 갖지 않길 바라는, '꿈의 주인들’에게 고스란히 바쳐진다.
그들에게, <고양이…>를 권한다. <고양이…>를 만나는 일은 그들의 ‘꿈’이 비로소 ‘현실’에 기반할, 작은 근거가 될 것이다. <고양이…>는 불편하리라 여겨지는, 매우 편안한 영화다. 짐작건대, 이 글이 나갈 즈음엔 <고양이…>는 모두 내렸을지 모르겠다. 내린 영화는 새삼스레 보려드는 사람들의 힘으로 다시 올려진다. 부드러운 기적으로.
김규항/출판인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