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수복과 동시에 진해에서 주워 만든 기계를 전부 뜯어다 서울 공보처 영화과에 이양을 해줬어요. 그때 공보처 영화과에 아리후렉스가 두대가 들어와 있었고. 거기서 <북위 사십 일도>니 이런 것을 녹음을 했고. 그 당시에 공보처는 녹음 시설이 너무나 참(이경순은 당시 제대로 방음 장치된 녹음실을 구할 수 없어 자정 이후에 방송사 녹음실을 사용했다고 증언한다. 이경순, <소리의 창조>- 필자).
그래서 일본 세기정밀녹음기계 16㎜와 35㎜를 도입했어요. 그것을 조립을 해갖고 말이죠, 그거로 또 <대한뉴우스>와 <국방뉴우스>를 녹음해 줬어요. 그 기계로 극영화 녹음을 한 것이 <코리아>(신상옥 감독, 1954). 그러고선 16미리 기계로선 이강천씨 첫 작품 <아리랑>을 녹음해줬고. 이게 미군하고 같이 연구해서 한 거고. 그 담에 세기 기계로 <출격명령>(홍성기 감독, 1954), <고향의 노래>(윤봉춘 감독, 1954), 그러고 <운명의 손>(한형모 감독, 1954). 그해 다행히도 <고향의 노래>가 아시아영화제에 출품됐죠. 그리고 <춘향전>(이규환 감독, 1955)을 맨든 것이 55년 시월이죠. 프린또 라쉬(프린트 러쉬)된 게. 내가 “우리 연기자들이 모두 재주꾼들로만 뫼였으니, 필름 천자를 한번에 그대로 돌려보자” 그래서 옥중장면 천자를 애누지(NG) 하나도 안 내고 그대로 통과한 기록을 냈어요. 그러고선 12월20일 그 추운 겨울에 국도에 개막 붙였는데, 첫날서부터 대만원이데요. 그 영화가 누가 그렇게 터질 줄 알았어요? 그러나 터지나마나 토키가 나빠가지고 아주 고생했어요.
그러고 있다가 인제 1955년에 미국 웅크라(국제연합한국재건단 UN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재단에서 아루시에(RCA) 자기(磁氣)녹음기 두대를 들여왔어요. 35㎜ 두대를. 이게 기증인지 도입인지 고거는 자세히 모르지만 일단 처음으로 자기녹음기 두대가 들어왔어요. 그 기계 가지고 첫 작품 한 것이 공보처에서 제작을 하던 <불사조의 언덕>이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촬영해 가지고서 16개국(6·25에 참전했던 UN군 16개국을 말함.- 필자)에다 전부 보냈어요. 이게 한국영화계 기계가 발전되는 과정이죠.
원조 물자로 들어온 부속품으로 녹음기 조립
1956년에 웅크라에서 2차로 아루시에 광음녹음기, 옵티칼이지 그러니까, 이걸 또 보내줬어요. 이건 원조로 들어온 거죠. 그 기계가 부속품만 와서 우리가 직접 조립을 했어요. 원조 물잔 그렇게 와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현재(대담 당시-필자) 사용하고 있는 기계가 이겁니다. 이 기계 가지고 극영화를 많이 했어요. 특히 이병일씨가 <시집가는 날>(1957)을 해가지고 아세아영화제에, 베를린영화제에 출품을 했습니다.
국방부 영화과에는 1955년에 아루시에 35㎜ 자기 녹음기 한대하고 옵티칼이 한 세트가 들어왔어요. 요기서 젤 첫 작품이 <망나니 비사>(김성민 감독, 1955)예요. 그게 최칠복(이경순과 함께 당시 대표적인 녹음기사로 전쟁 당시 진해에서 녹음작업을 하다가 55년경 서울로 올라왔다.- 필자)씨가 서울 올라와서 처음 헌 겁니다.
1958년에 한국영화문화협회가 있었어요. 거기가 아세아 재단에서 기계를 원조받았는데 날더러 꼭 녹음실로 와달라기에 기계를 시설해주고 거기로 옮겼죠. 그래 갖고서 거기에서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감독, 1958)를 했죠. 이것을 김지미가 직접 녹음을 했고. <별아 내가슴에> 때 지미하고 홍성기하고 아마 둘이 조꼼 그런 일이 있었고.
“벙어리 된 녹음기계 입 열게만 해다오”
그런 다음에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에서 저헌테 교섭이 왔어요. 이것이 1958년이에요(당시 홍찬은 수도영화사와 평화신문사의 사장이었는데, 대통령 이승만의 특별 융자를 받아 안양에 동양 최대 규모의 영화 촬영소를 지으려 했다. 홍찬은 이경순을 이곳 녹음실 책임자로 끌어오기 위해 여러 사람을 보냈다.- 필자). 가 봤더니 참 기계가 어마어마합디다. 웨스트렉슨 사운드 시스템 일체, 미첼 카메라 3대. 일하는 사람으로서 웨스트렉슨도 한번 쓰고픈 의욕이 생기고, 또 홍 사장이 그거 들고서 “좌우간 어떻게든 벙어리된 녹음기계를 입 열게만 해다오. 내 원이 그거다” 그래갖고서 공보실이니 공보처니 떠나서 안양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 내려가서 처음에는 뭐 갈비다, 닭이다, 잘 가져다 대접합디다. 한 15일 지나니까 벨안간에 고구마가 들어와요(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던 안양촬영소는 과도한 투자로 인해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다.- 필자). 뭐 고구마 한끼 두끼 먹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적은 여기서 우리가 기계를 제대로 동작허느냐 이것이 목적이 아닙니까? 그래갖고 거기서 약 한달을 고생을 해서 그 기계를 동작시켰어요. 그래서 첫 작품을 뭣을 했는고 허니 <꽃도 생명이 있다면>. 이것이 홍일명 감독입니다. 그러고서 <낭만열차>. 미첼 카메라로 박상호가 했을 거예요. 그외 여러 작품이 있어요. 그래가지고선 <꽃도 생명…>이 소리가 나고 허니까, 영화인들 사이에 안양촬영소 소리가 과연 좋다 하는 것이 그 소문이 나가지고서는 서울서 녹음을 허러 내려와서 녹음 스케줄을 잡고 말이죠,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후라이보이> <곰> 여러 작품을 했어요. 1959년에도 전창근씨의 <안중근 의사> 등등을 했고. 이걸 허다가 어떻게 벨안간에 안양촬영소가 은행관계로 문을 닫게 되지 않았어요? 한여름을 쉬었어요. 쉬다가 공보처에서 <독립협회의 청년 이승만>이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스타디오(스튜디오)는 안양촬영소를 사용했고. 공문이 와가지고서 제가 공보처 올라와서 녹음을 해줬고요.(자유당 시절의 정치깡패 임화수가 운영한 한국연예가 제작사로 등록돼 있다. ‘공보처’ 관련사실을 회고하는 이 대목에서 이 정권과 임화수의 유착이 어느 정도였나 짐작할 수 있다. ― 편집자)
안양촬영소에서 여러 작품 허는 동안에, 1961년 안양촬영소 동태를 가만 보니까, 은행관계 이자관계로 와서 딱지를 붙이고, 일을 했다 안 했다 하고 상당히 불안해요. 그러믄 스타디오에서 내가 개인 기계로 동시녹음을 하고, 안양촬영소 기계로 후시녹음을 하고 이러면 어느 정도래도 뒷받침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서독에다가 시멘스 녹음 기계를 주문했어요. 이것을 모모헌 사람들이 중상모략 해갖고 “이경순이가 저만 돈을 벌려고 안양촬영소에다 기계를 사왔다”, 그 소리를 듣고 홍찬씨가 날 만나도 이야기도 안 해요. 결국 저는 다시는 안양촬영소로 내려가지 못했고, 기계는 마루에서 썩었지요. 한 삼사개월 썩었어요. 그때 재정으로서 동시녹음을 허자니, 동시녹음 허자고 나오는 제작자도 없고, 그러는 동안에 한양영화사가 발족이 되기 시작했어요.
61년에 한양영화공사가 발족이 되면서 김소동(감독, 당시 한양대 교수- 필자)이가 나를 한번 만자자고 그럽디다. 만났더니 한양재단 김연준(당시 한양대 총장- 필자)씨가 영화제작을 할 테니, 너 기계 있는 걸 우리쪽에다 설치해 가지고서 녹음을 허면 어떠냐. 단 명칭은 한양녹음실로 해야 된다. 그 당시에 한양녹음실이건 뭐건 나도 악에 받쳤단 말예요. 어떻게든 동시녹음을 한번 키워보갔다는 의욕으로 있는 거 없는 거 다 팔아가지고 기계를 들여왔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후시녹음을 하더래도 연명을 해야겠다말야. 나는 무조건 좋습니다. 허겠습니다. 그런데 해필 장소가 어데 장손고 허니, 홍 사장네 평화신문사 자리, 바로 윤전기 돌아가던 그 자리란 말예요. 오해를 샀죠. 거기다 스타디오를 지어가지고 한양녹음실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시작을 한 것이죠.
한양스튜디오 설립
한양녹음실에 첫 작품으로 권영순 감독의 <목숨을 걸고>가 들어왔어요. 참 ‘목숨을 걸고’ 첫 작품을 했단 말예요. 첫 작품을 허고 나니 안양촬영소로는 한 작품도 안 내려가드라 말야. 전에는 안양촬영소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채려놨으니까 전부 들와가지고 2부제 3부제까지 녹음을 했단 말예요. 홍 사장이 그때 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디다. 그래 내 병원에 찾아갔어요. 찾아갔더니, 과거는 다 내 잘못이라고 그때 참 손목 붙잡고 우리가 같이 울어도 보고 그런 일이 있었고. 그래도 그분이 안양촬영소라도 냉겨놓고 돌아가셨으니까. 공로는 있다고.그래가지고선 오늘날 저희가 여기에 한양스타디오(한양녹음실은 1965년 한양스타디오로 독립한다.- 필자)로 해갖고, 여러분의 협조 아래서 참 지금 녹음을 하고 있고. 한양스타디오가 루므(룸. 방음시설된 녹음실- 필자)가 ABC로 돼 있고, 그러고 에코 루므가 있고. 도서실이 있고. 여기 현상기사가 장의환, 이덕영이 외 삼. 그러고 녹음에는 이경순, 손인호, 김병수, 김성찬, 이재웅, 그외에 여덟. 편집실 김창순 외 둘. 우리가 전부 해서 한 삼십명 돼요.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우리가 간편허게 동시녹음 진출을 할 수 있느냐, 이것이 지금 제일 문제거린데. 뭐 딴 기술분야는 많이 진보됐겠지마는 특히 우리 녹음분야에 있어서 극영화가 한해 백, 이백편 가까이 나오는데 이백편 몽땅 후시녹음이래는 것은 참 이야기가 안 돼요. 제작자가 여러 가지 애로도 있겠습니다마는 몇편이라도 동시녹음을 했으면, 우리 한국영화 녹음계가 체면이라도 서지 않을까 이런 것을 바라는 것뿐입니다.
정리 최예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email protected]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