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이란 이름만큼 예쁜 언니를 기대하고 들어선 분당의 자그마한 오피스텔에는 염색도 하지 않은 검은 머리를 어깨에 닿을 만큼 기른 ‘그’가 앉아 있었다. “뭘로 드실래요? 음료수랑 녹차랑 커피 있어요.” 예쁜 언니가 전혀 안 부럽다. 작업실을 둘러보니 금방 정리를 마친 듯하다. 7평 남짓한 룸 안에 빼곡이 들어선 컴퓨터와 비디오 세트, 35인치 텔레비전, 편집기기 등에 둘러싸인 그는 오히려 편안한 눈치다. 가만히 보니 서른을 두해나 넘긴 노총각답지 않게 동안의 얼굴을 지녔다. 취미가 MTV 보기과 음악감상이란다. 학창 시절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음악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변화가 자신에게도 신기하다.
자신있었던 과목은 과학. 그냥 논리적인 해결과정이 좋았다. 중학교 올라가 자신의 돈으로 마련한 컴퓨터에 빠진 탓도 컸다. 또래들이 오락실과 분식집을 전전하며 놀거리를 찾을 때, 그는 컴퓨터가 가져다주는 신기함을 남 몰래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평소에 즐겨보던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컴퓨터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애니메이터 툴과 그래픽 프로그램에도 흥미를 느낀다. 영상에 대한 끊이지 않는 열정은, 그러나 대학의 전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의 방황은 경제학과를 출발해 중문과를 경유하여 영화과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영화과에 들어가자 남들보다 느린 출발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데뷔작격인 <회전>(1997)으로 독립단편영화제의 장려상을 수상하자 영화감독에의 길이 조금씩 보이는 듯했다. 졸업 뒤 그는 오랫동안 염두에 두었던 애니메이션 공부를 시작한다. 영화진흥위가 막 운영하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아카데미에 1기생으로 들어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컴퓨터로 표현해 보았다. 영화작업을 할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를 더욱 꼼꼼히 살피게 되었고, 그만큼 디테일한 부분을 처리하는 데 능숙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작업의 백미는 역시 장편. 임상수 감독과 함께한 장편 작업은 그동안 자신이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있었음을 깨닫게 한 계기였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화는 대개 아비드 편집기를 거치나 이번 <눈물> 편집의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조립한 편집용 PC로 편집을 마쳤다. 그간 단편작업하면서 쌓은 실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겠다는 감독의 말에 시험삼아 시작한 일이 무서운 결과를 낳았다. IBM 범용 DV(Digital Video) 캡처카드에다 Adobe Premiere 5.1c 등의 편집용 소프트웨어를 장착하는 등 시스템 구축에 든 돈은 2천만원이 채 안 됐다. 아비드 장비를 갖추려면 몇배의 돈이 들어갔을 작업이었다. 테스트 결과를 꼼꼼히 살펴보던 감독의 입에서 ‘OK’ 사인을 받아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고가의 장비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간단한 파일 관리만으로도 손쉽게 편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때 기기 가격과 작업 방식에 회의를 갖던 충무로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그는 이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란다. 단편을 몇편 더 찍을 것이다. 감독 데뷔는 하늘에 맡긴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에 뛰어든 이상 천천히 자신을 쌓아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이제 시작이다.
심지현/ 객원기자[email protected]
사진 오계옥 기자[email protected]
프로필
1970년생
91년 한양대 연영과 입학
99년 영화진흥위 애니메이션 아카데미 1기 수석 입학
<순환>(1996), <회전>(1997), (1998) 등 단편 다수
97년 <회전>으로 23회 한국 독립단편영화제 장려상 입상
<질주>(1999) 옵티컬 디자인
<눈물>(2000)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