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되기까지
단편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에겐 윤종찬(39)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플레이백> <메멘토> <풍경> 등 미국 시라큐스 영화과 대학원 재학 시절 찍은 단편영화 3편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기억과 운명에 관한 단편 삼부작’이라 불릴 만한 이들 영화를 만들고 국내로 돌아온 그는 99년 <수호戰>이라는 영화로 데뷔할 뻔했다. 그러나 한 젊은이가 폭력배들의 싸움에 얽혀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이야기인 <수호戰>은 제작여건상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고 2년이 지난 현재 장편데뷔작을 찍고 있다.
그는 최근 신인감독들과 비교할 때 꽤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한다. 82년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전공에 별 의욕이 없어 87년 다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기 때문. 졸업 뒤 하명중영화사에서 충무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원치 않던 외화수입, 번역 등 기획실장 일만 하다 92년 김영빈 감독의 <비상구가 없다> 조감독을 하면서 본격적인 감독수업을 시작했다. 조감독 한편을 마친 뒤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출국하기 며칠 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났다. 그는 이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무너진 천민자본주의의 폐허를 뒤로 하고 떠난 이국 땅에서 윤종찬 감독은 기억과 운명에 관한 단편 3편을 만들었다. 그는 미국 유학 경험에 관해 “테크닉이 아니라 영화와 세상을 보는 시각에 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기였다”고 말한다.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에 대해 적당히 관심갖는 영화들을 좋아했던 반면 유학을 하면서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을 담은 영화를 선호하게 됐다. 말하자면 <메탈자켓>이나 앨런 파커 영화 등에서 우디 앨런, 짐 자무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으로 애정을 쏟는 대상이 바뀐 셈. 유학 시절 만든 단편들이 호평받았지만 장편데뷔가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지난 3년간 남들 못지않은 산고 끝에 촬영에 들어간 영화 <소름>은 현재 50%가량 찍은 상태다.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그의 데뷔작 <소름>은 단편 <메멘토>의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다. 윤종찬 감독은 미국에서 <메멘토>를 찍을 때 이미, 국내로 돌아가면 장편으로 다시 만들어보리라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 등골이 서늘해질 무시무시한 운명의 형상을 그린다. 쇠락한 서민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음산한 사건들은 깜짝쇼에 의존하는 전형적 공포영화들과 전혀 다른 맥락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지극히 어둡고 비관적인 분위기의 영화를 통해 그는 병적이고 나약하면서 강한 척하는 인간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촬영 초기 현장에서 그는 촬영, 조명스탭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 기존 충무로영화와 전혀 다른 색조의 화면을 주문했기 때문. 관행상 일반적인 상업영화에서 인물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더라도 형상이 정확히 보여야 한다. 그러나 윤종찬 감독은 그럴 필요없다며 적정노출과 노출부족 사이에서 화면을 만들고자 했다. 전체 137신 가운데 100신 이상이 밤 장면인 영화를 그렇게 어둡게 찍는다는 데 쉽게 동의할 스탭은 별로 없을 것이다. 결국 테스트 촬영까지 거쳐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스탭들도 감독을 철저히 따르게 됐다. <소름>의 남녀주인공은 <반칙왕>의 장진영과 TV미니시리즈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의 김명민이 맡았다. 스타급 배우는 아니지만 그는 “틀에 박힌 배우랑 하기는 싫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소름>은 상당히 새롭고 신선한 영화로 보인다. 냉혹한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감독의 개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 될 것은 분명하다.
▒<소름>은 어떤 영화
곧 헐릴 낡은 아파트에 이삿짐이 도착한다. 미금아파트 504호에 새로 입주한 청년의 이름은 용현. 그는 30년 전 504호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을 모른다. 옆집 여자와 눈이 맞은 사내가 부인을 죽이고 갓난아이를 버려둔 채 도망쳤다는 과거사를 지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504호에선 얼마 전 소설가 광태가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왠지 불길한 이곳에서 용현은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여자 선영을 알게 된다. 510호에 살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용현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 직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용현이 택시영업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 선영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편 시체를 보여준다. 용현은 선영을 도와 시체를 묻고 둘은 더 가까워진다. 그러나 504호에 깃든 저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505호에 사는 소설가가 용현에게 말한다. 30년 전 그곳에서 죽은 여인의 시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등장인물들은 그들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조금씩 광기에 휩싸인다.
남동철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