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의 준말인 ‘코스프레’가 우리나라에서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 무렵이다. 코스프레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여기에 관심이나 취미가 없는 사람의 지식 수준에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캐릭터로 분장하고 노는 일’이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캐릭터는 흔히 현실보다도 판타지와 상상에 기반을 둔다. 말하자면 코스프레 문화가 갖는 리얼리티는 모방의 대상이 되는 세계를 얼마나 제대로 과장해 표현하는가에 있는 셈이다. 국내에서 제법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화가 여전히 잘 이해받지 못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 클 것이다.
지난 주말인 5월26일과 27일, 서울 대치동에서 전국 규모의 코스프레 대회가 열렸다. 제11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과 청강문화산업대학이 공동주최한 이 행사에는 90여팀의 코스튬 플레이어(코스프레어)들이 참여했다. 그들은 여름을 앞당기는 따가운 햇볕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창하고 화려한 차림으로 야외무대 안팎을 뽐내듯 누비고 다녔다. 대부분이 일본 애니메이션/만화를 즐기다가 코스프레를 하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 은발의 마법사, 날개를 단 여왕, 붉은 머리 기사 따위의 죄다 희한할 뿐인 이 복장놀이를 그들은 왜 이토록 열정적으로 즐기는 것일까. 대체 그 세계가 어떠하기에.
먼 미래의 교황부터 황진이까지, 코스의 세계는 넓더라
“자, 이번에는 아마도 많은 분들이 기대하셨을 법한 순서입니다. 세인트 블러드팀이 준비했습니다. 트리니티 블러드!”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 야외무대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진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 천막도 없이 앉아 있던 200여명의 관객은 음악이 흐르자 곧 숨을 죽인다. 무대 한쪽에서 걸어나오는 기사풍 복장을 한 사람 그리고 뒤따르는 공주풍의 복장을 한 사람 그리고 뒤따르는 왕자 그리고 교황. “카테리나다, 카테리나!” “와 진짜 똑같다!” 중고생쯤으로 보이는 여자 관객 둘이 속닥인다. 트리니티 블러드는 뭐고 카테리나는 뭐란 말인가. 같은 관객이지만 기자는 지금 보고 듣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데 관객은 무대에 빨려든 뒤다. 뒤에 안 사실인데, <트리니티 블러드>는 중세시대를 닮은 먼 미래를 배경으로 인류와 뱀파이어간의 투쟁을 그린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원작 만화의 일러스트가 보여준 화려한 그림체와 색감 때문에 애니메이션화에 대한 우려가 일본에서도 있었다는 작품이다. 다른 코스프레팀의 말에 따르면 <트리니티 블러드>는 요즘 코스프레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코스’(‘코스프레’의 줄임말) 종목 중 하나라고.
코스프레 대상은 일본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다. 이날 대회 참가자들 중에는 국내 격주간 만화지 <윙크>에 연재 중인 한국만화 <하백의 신부>, 온라인게임 <마비노기>, 드라마 <주몽> <황진이>뿐 아니라, 일본 아이돌 걸그룹 모닝 무스메의 <미스터 문라이트>라는 곡을 동화 <신데렐라> 버전에 맞춰 뮤지컬화한 팀까지 있었다. <슈퍼챔프>에 연재 중인 국내만화 <위치 헌터>를 코스프레한 청강대 동아리 표랑군무팀은 “요즘은 국내 만화 작품들도 비주얼이 예뻐서 코스프레 하기에 좋다”고 설명한다. 코스프레 대상은 영화나 소설의 인물로도 확장되고, 창작 코스프레도 이제는 흔한 편이다. ‘청’(靑)이라는 제목의 창작 코스프레를 준비한 세명의 여중생은 행사장 한쪽 구석에서 새하얀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서로의 살갗에 흰 파우더를 칠해주기 바쁘다. “한 소녀의 꿈 이야기이고, 소녀의 순수함을 표현하고 싶어서 흰 분장을 했다”며 “만화나 애니메이션 주인공은 비주얼이나 보여줄 수 있는 동작이 제한적이라 우리 식대로 표현하고 싶어서 창작하기로 했다”는 것이 이들의 창작 의도다.
한땀 한땀 자급자족, 마법의 옷을 만든다
코스프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니뭐니해도 옷을 만드는 일이다. 8년째 <세일러문> 코스프레 공연만을 해오고 있는 ‘세라센시’ 팀장 박윤주(27)씨는 이렇게 말한다. “진짜 코스프레 정신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가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캐릭터로 세팅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오는 기쁨이 코스프레를 즐기는 진짜 이유다.” 실제로 대회 참가자들에게 코스프레 준비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물으면 대부분 의상 제작이라고 답한다. 소재를 정하고, 재료를 구매하고, 본을 뜨고, 재단하고, 바느질하고, 장식을 다는 모든 과정이 이들에게는 의미가 크다. 일본 만화 <디 그레이 맨>의 전사 알렌 워커를 코스프레한 김성현(18) 서울미고 학생은 “깃털 붙이는 작업이 제일 신경쓰였다”며 “강력접착제 글루건을 써서 하다가 열에 손가락을 데었다”고 말한다. 이아람(23)씨는 <하백의 신부>의 신부 캐릭터를 코스프레한 개인 참가자. 그가 겪은 애로 사항은 “한참 연재 중인 만화다보니 아직 의상 전체를 보여준 일러스트가 안 나와서 허리선 아래로는 모양과 색깔을 모두 상상해 만들어야 했다”는 것.
이러한 의상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은 2만~3만원에서 20만~30만원선까지 다양하다. 다음 코스프레 동호회 ‘다코동’ 운영자인 박수원씨는 “초보자일수록 잘 몰라서 돈을 많이 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아유미의 번안곡으로도 잘 알려진 노래 <큐티 하니>에 맞춰 일본 애니메이션 <프린세스 프린세스> 코스프레 무대를 보여준 대구 출신 ‘프린스 프린스’팀은 “1인당 가발, 구두까지 다 합쳐서 10만원 정도 들었는데 그것도 비싸게 든 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고물품 교환이나 전문 판매업체를 통해 의상을 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코스프레 촬영회 행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코동’ 온라인 사이트에 들어가면 사진작가들을 위한 게시판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이런 변화를, 골수 코스프레어들은 낯설어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한국식으로 변형된 극형식 코스프레
“코스프레는 단순한 분장쇼가 아니다”라는 박윤주씨의 말에는 다른 의미도 들어 있다. 원산지 일본과 달리 국내 코스프레 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개인 플레이보다 팀플레이가 더 일반적이라는 점이다. 코스프레의 의미가 ‘특정 캐릭터의 옷을 만들어 입는다’는 쪽에만 방점이 찍히면 팀플레이가 강조될 이유는 없다. 이번 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한 코스프레어들이 본선 무대를 위해 보란 듯 준비한 것은 15~20분 내외의 단막극 형식 뮤지컬들. 원작에 기반해 스토리를 새로 짜고, 시나리오도 직접 쓴 것들이다. 대사들을 전부 미리 녹음하고 음악도 적절히 별도로 선곡하거나 원작에서 골라 넣는다. 가창곡은 MR(반주음악)을 만든 다음 코스프레어들이 직접 불러 녹음한다. 이렇게 준비된 CD에는 이야기 진행에 맞는 효과음까지 입혀져 있다. 물론 주인공이 한껏 자세를 잡고 “비너스 스타 파워!” 하고 외쳤을 때 그의 플라스틱 팔찌에서 해당 광선이 나오지 않는 점이 다소 당혹하게 하지만 그건 사소한 소격효과일 뿐이다. 이 복장놀이가 주는 진짜 희열은, 미디어 안에 갇혀 있던 판타지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코스프레는 결국 연극이나 뮤지컬 등 주류 공연 장르와도 크게 다를 게 없다. 표현하려는 텍스트가 <맥베스>냐 <파이널 판타지>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코스프레어들이 코스프레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 것은 “내가 아닌 내가 원하는 다른 인물이 되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인물에 마음껏 다가가볼 수 있다는 점은 다른 공연 장르에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느끼는 만족과 유사하다. 아닌 게 아니라 무대에 올라가 공연 중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들을 배우라고 부르지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여중고생에서 20대 초반 여성에 몰려 있던 코스프레어들의 연령과 성별이 20대 후반과 남성들로 넓어지는 것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자아실현의 매력 때문이 아닐까. 애니메이션 <블리치> 코스프레어로 참여한 부천 도당고 최원일(18) 학생은 “엄마와 같이 의상을 만들었다”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니까 성격도 더 적극적이 되고 부모님도 그걸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고 말한다.
코스프레의 쾌락 찾기
주말 이틀간 행사 중에 가장 특이한 주목을 받았던 코스프레어 중 하나는 <황진이>를 코스프레한 46살 여성 임정숙씨. 비영리단체 ‘아키아연대’(아줌마를 키우는 아줌마 연대)의 이사로 활동 중이라는 임정숙씨는 단체에서 하는 여러 활동 중에 ‘여성문화축제’ 이벤트 중 하나로 지난해부터 코스프레를 시작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로 처음 해봤는데 재미있었고 반응도 나름 좋았다”고. 올해 축제는 6월초 남이섬에서 있을 예정이란다. 그는 “코스프레라는 게 지나치게 일본색에 치우친 것 같다”며 이번엔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소재로 삼을 계획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SICAF와 청강산업대학이 공동주최한 이 대회는 국내에서 열리는 수많은 코스프레 행사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코믹월드’에서 주최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아마추어 만화축제만 해도 매년 15회 이상씩 서울과 부산에서 열리고 있고, 블리자드 같은 게임회사들이 별도로 여는 이벤트들도 무수하다. 코스프레어들은 지역에 상관없이 축제 장소를 찾아다니며 그날 하루를 다른 인물로 살아본다. 그것이 코스프레의 쾌락이다. 옷 한벌을 갈아입었을 뿐인데 내가 다르게 보이고, 달라진 나를 봐주는 시선이 있다는 것. 순간의 착각일 뿐이며 궁극의 자아실현은 있을 수 없는 비극임에도 거기에서 얻어질 수 있는 변화의 유혹은 크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될 수 없는 내가 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8년째 ‘메이크업 문 파워’
<세일러문> 전문 코스프레팀 ‘세라센시’
<세일러문> 전문 코스프레팀 ‘세라센시’가 처음 생겼을 때, 팀장인 박윤주씨는 고3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꼬마는 이제 대학생이다. <세일러문>의 전사별 팬클럽 회장이던 사람들이 모여 팀을 꾸린 것이 1999년. 8년 동안 각종 코스프레 행사에 다닌 것은 물론이고, 대학교 행사나 부산, 대구 등 지방도시 행사에도 초청받았다. 그간 인터뷰도 무수히 한 때문인지 박윤주 팀장은 기자가 이제 던질 질문들까지 예상해서 술술 이야기를 뱉어준다. “주말마다 모여서 운동하고 춤추고 무대 연습하고, 동대문 돌아다니면서 재료 사고, 그런 일을 8년 동안 해온 거죠. 남들이 스킬하고 자수하잖아요. 그런 취미들이랑 똑같은데 그걸 오래했다는 것뿐이에요.”
현재 30명의 팀원이 활동 중인 ‘세라센시’는 1년에 4회 정도 큰 공연을 치른다. 나머지 시간은 공연 준비 기간으로도 빠듯하게 흐른다고. 스토리 구상, 시나리오 짜기, 곡 번안, 녹음에 의상과 가발 등 복장 준비까지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공연은 보통 20~30분 정도다. “대구나 울산 같은 지방에서 우리 공연을 보려고 올라오시는 분들도 있다”고 박윤주 팀장이 덧붙인다. “매번 새로운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다. 하다못해 가발도 공연 때마다 조금씩 손보고 다듬는다.”
이 일에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 “옷 잘 만들었다는 얘기 들을 때가 제일 뿌듯하다. 일본에서도 벌당 200만원 줄 테니까 팔라는 제의가 들어왔었는데 거절했다. 우리 팀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나한테는 자식 같아서 몇 백만원을 줘도 못 판다.” 옷장에 한가득 쌓여가는 세일러문 전사들의 옷들이 그와 그의 팀원들의 8년을 이야기해줄 가장 귀한 재산이다. 전업이 아닌 취미활동으로서 ‘전문’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세라센시’는 지금껏 해오던 대로 앞으로도 할 계획이라고 한다. “나이가 더 들어서 마흔 정도 되면 이런 옷은 더이상 못 입겠지만 이쪽 일을 계속 할 거다.” 사실 ‘세라센시’는 이날 멤버 한명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공연시간에 맞추지도 못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과연 8년의 경력이 만든 힘인지, 박 팀장은 안절부절못하는 팀원을 안정시키더니 다른 팀의 공연을 관람하러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