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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예]`국제시장에서 몸으로 배웠다`
2001-02-16

<수쥬>의 로우예와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지석 대담

로우예는 부산국제영화제와 인연이 많은 사람이다. 1998년, 제3회 부산영화제를 준비중이던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제1회 PPP프로젝트 신청작 중 <패션게임>의 로우예를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그의 데뷔작 <주말연인>을 보며 알 수 없는 신선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부산을 통해 만난 투자자들과 <수쥬>를 만들고 난 지난 2000년, 로우예는 제3회 PPP에서도 차기작 <여름궁전>이 부산상을 획득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긴 여행이었다고 했다. <수쥬>의 개봉에 앞서 중국에서 한국까지 한나절을 날아온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1년 전 친구가 선물한 ‘바리깡’ 덕에 돈 안 들이고 유지하고 있다는 까까머리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긴 나이를 배반하고, 그를 20대의 영화청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김지석(이하 김) 늦었지만 도쿄 필름엑스영화제에서 대상받은 것 축하한다.

■로우예(이하 로우) 고맙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걸로 안다.

■김 그렇다. 혹시 심사과정이 궁금하진 않나?

■로우 물론 궁금하긴 하지만, 여태껏 그런 식으로 물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물어보질 못했다. (웃음)

■김 <수쥬>에 대한 심사는 굉장히 신속히 이루어졌다. 5명의 심사위원들이 2작품씩 추천했는데 5명 중 4명의 추천에 모두 <수쥬>가 올라 있었다.(사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수쥬>를 만들기까지 이야기를 좀 해보자. 베이징아카데미를 졸업한 게 89년이고 데뷔작인 <주말연인>이 93년에 만들어졌으니까, 동기생에 비하면 데뷔가 좀 늦은 편이다.

■로우 졸업하자마자 돈벌려고 TV프로그램이나 광고를 많이 찍었다. 그래서 데뷔가 많이 늦어진 것 같다. 하지만 광고를 찍다보니 영화 만드는 동기들에 비해 늘 풍족한 편이었다고 기억한다. 물론 영화를 찍기 시작한 이후 나 역시 그들처럼 돈없는 감독이 되긴 했지만. (웃음)

■김 <주말연인>은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로우 아카데미 졸업 뒤 시나리오는 죽 써왔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제작소를 찾아다니고, 제작비를 조달하고 나니 93년 2월이었다.

■김 중국은 메이저 스튜디오가 90년 초부터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제작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제작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로우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 대부분 독립영화감독들은 제작비를 직접 구하러 다닌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영화를 만드는지 모른다.

■김 93년에 <주말연인>을 완성시키고도 2년 동안 상영허가를 못 받았다던데….

■로우 93년 6월부터 찍기 시작해서 93년 말에 영화를 완성했다. 하지만 95년이 돼서야 상영하게 되었다. 이유? 그런 건 없다. 늘 전영국, 그들 마음대로 하니까.

■김 ‘슈퍼시티 프로젝트’는 어떤 식으로 시작하게 되었나.

■로우 <주말연인>을 본 방송사에서 TV프로그램을 찍자는 요구가 들어왔다. 처음엔 우리는 영화만 한다며 거절했다. 그렇게 얼마간 일도 없이 있다가 “그때 왜 안 한다고 했지?”하는 후회가 들었다. 단편으로 얼마든지 영화처럼 만들 수도 있고 여러 시도도 할 수 있는 건데…. 방송사와 다시 협상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켜나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흔쾌히 그러자고 해서 참여하게 되었다.

■김 총 10편이 제작되었나?

■로우 처음 계획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10명의 젊은 감독들이 10개의 다른 영화를 만드는 거였다. 그러나 결국 이런저런 사정으로 5편만 완성되었다.

■김 <수쥬> 역시 ‘슈퍼시티 프로젝트’ 중 하나로 시작된 거 아닌가?로우 그렇진 않다. 시기적으로 비슷할 뿐 <수쥬>는 98년에 내가 나이안 등과 함께 설립한 드림 팩토리에서 독립적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이다.

“중국 상하이의 동서를 가르는 수쥬강. 수쥬강을 가만히 지켜보다보면 강은 당신에게 낯선 표정의 사람들을 보여줄 것이다. 그들의 삶과 그들의 고통. 운이 좋다면 그들의 사랑까지….”<수쥬> 中

■김 상하이에는 드림 팩토리 같은 독립영화사들이 많이 존재하는가?

■로우 독립프로덕션들은 많지만 대부분 TV용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프로덕션이다. 영화는 만들기도 너무 복잡하고, 상영절차도 까다로워서 많지는 않다.

■김 <수쥬>는 중국에 개봉되었나?

■로우 아니다. 제작이 끝나고 1년 정도 기다린 것 같다. 하지만 늘 이렇기 때문에 이상할 것도 없다.

■김 만약 <수쥬>를 개봉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 배급을 할 예정인가. 그 사이 중국의 극장에도 일대 변화가 있었지 않나. 일률적이었던 관람료를 파격적으로 내리기도 하고 무료관람도 시키는 등 점점 경쟁적인 분위기도 띄우고.

■로우 일단 정식으로 상영이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 급선무이고 그 이후엔 또 배급회사를 찾아다닐 것이다. 드림 팩토리에서 배급까지 맡을 여력은 없다. 그저 제작에 만족하려 한다.

■김 중국영화는 이제 변화의 시대를 맞이할 시기인 것 같다. WTO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고, 최근 중국정부는 10편 내외이던 외화수입을 3년 내에 50편으로 늘리고 외국 자본투자도 허용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코닥이 상하이에 멀티플렉스를 짓겠다는 말도 들었다. 점차 경쟁체제로 들어갈 것 같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시장에서의 생존자는 기존의 감독이나 메이저 영화사보다 오히려 당신 같은 독립영화감독이나 제작사가 될 거라고 본다. 이런 변화정세 속에 자신의 진로에 관해 생각해본 적 있나?

■로우 메이저 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하는 거나 드림 팩토리 같은 독립영화사가 제작하는 거나 사실 제작방식으로 보자면 큰 차이는 없다. 그저 그들이 더 많은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고 더 좋은 장비가 있다는, 제작 규모에서의 차이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과 우리가 분명히 다른 점은 어디를 보고 만드냐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베이징에, 중국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한다. 그간 국제시장에서 어떤 식으로 우리의 프로젝트를 알려야 하고 어떻게 펀딩을 해야 하는지 몸으로 부딪혀 배웠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그렇지만 중국영화시장의 변화가 하루아침에, 당장 일어날 것이라 보지는 않는다. 5년 뒤나 10년 뒤쯤이 되지 않을까?

“어느 날, 내가 만약 당신 곁을 떠난다면…. 그때 넌 마르다처럼 날 찾을 거야?”

“그래.”

“영원히 나를 찾을 거야?”

“그래.”

“죽을 때까지?”

“그래.”

“…거짓말….” <수쥬> 中

■김 감독은 상하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그곳에서 작품을 만든다. <수쥬>만 보더라도 그 도시가 준 어떤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다. 나 역시 부산에서 나고, 자라고, 결국 일도 부산영화제에서 하고 있다. (웃음) 그래선지 나에겐 부산이라는 도시가 주는 특별한 기운이 있는 것 같다. 상하이라는 도시가 당신에게 주는 영감이 있나?

■로우 상하이는 나에게 특별한 도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곳에서 나고 자라다보니 특별한 애정 같은 게 있다. 영화에서 그런 상하이의 독특한 도시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해도 그건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김 <수쥬>는 4명의 사랑을 보여준다. 여성의 경우 둘 다 사랑의 환상을 좇고 남자들은 반반이다. 즉 메메이나 무단은 사랑을 환상적이고 영원하다고 믿는다. 이건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랑의 환상을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설정인가?

■로우 꼭 그렇지는 않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는진 몰라도,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수쥬강에 인어가 산다는 걸 믿듯 그렇게 믿고 싶은 거다.

■김 ‘나’는 떠난 사랑을 찾아 헤매기보다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며 술을 마시겠노라고 한다. ‘나’의 내레이션을 감독이 직접 했다고 하는데, 당신 또한 ‘나’처럼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환상보다 현실을 믿나?

■로우 ‘나’라는 사람이 실제 나와 동일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 역시 영원한 사랑 따위는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런 사랑을 쫓는 사람 중 하나다.

■김 <수쥬>는 해외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공감대와 이해를 불러일으키는것 같다. 사실 5세대 감독들은 외국인들의 이국적 취향을 만족시키려 한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당신의 영화는 그런 의심에서 완전히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로우 내 작품을 통해 고전적이고, 오리엔탈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전혀 없다. 문화의 근원이 모호한 현 시대에 진짜 고유한 것은 부재한다고 본다. 없는 걸 만들어서 ‘이건 중국적인 거야’라고 보여준다는 건 웃기는 일이다. 데뷔작 <주말연인>을 본 사람들이 “이런 건 외국영화에서 10년 전이나 20년 전에 보던 젊은애들 이야기다. 이런 것 외국에 가져가면 촌스러워서 안 좋아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지금 우리 모습인데. 외국의 20년 전 같은 모습, 낙후되었든, 촌스럽든 이것이 현재의 중국 젊은 애들이다. 나는 그저 그 모습을 담을 뿐이다.

■김 <수쥬>에 대한 서구 평들을 보면 <현기증>이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등과 곧잘 비교하기도 한다. 동양에서는 왕가위에 대한 언급도 잦은 편이고.

■로우 아주 정상적인 평이라고 본다. 아카데미에서 영화를 배울 때 난 많은 영화를 봤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영화가 있다. 내가 독창적이라고 우겨도 아마 몇십년 전 혹은 몇년 전 누군가 찍은 것일 수도 있다. 정말 독창적일 수 있는 방법이 있긴 있는데, 그건 세상에 나온 영화를 모두 다 보고 한 부분도 겹치지 않게 찍는 거다. (웃음) 독창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중요한 것은 내가 찍고 싶은 게 무언가, 그것을 찍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김 <수쥬>는 그간 보아왔던 중국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세련되었다고 말하고 혹자는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이라고도 한다. 촬영도 과감한 핸드헬드기법을 사용했는데, 트라이포드 세울 여건이 아니라서 들고 찍었다는 말도 있지만, 촬영감독 왕위는 이제 입봉하는 감독인데 모험이지 않았나?

■로우 왕위와는 조감독 시절부터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사이라 서로를 잘 안다. 원래 스틸 촬영을 주로 했던 사람인데 그가 찍은 몇장의 흑백사진을 보고 촬영에 매료되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느낌과 샷을 너무나 잘 이해했고, 어떨 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촬영 내내 모니터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김 어떤 인터뷰에서인가 영화는 환상이고 환상을 통해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 있다.

로우 조금 다르게 해석한 것 같다. 영화를 보는 과정은 환상적인 거지만 그것을 찍는 작업은 현실적인 것이다는 말이었다.

성황묘,

서구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만들어진 라오상하이의 거리를 보면

난 영화촬영을 위해 지은 셋트가 생각난다.이 거리는 일종의 꿈을 만족시켰다. 즉 오리엔탈의 꿈을.사실 여기는 정말 아름답다.그러나 당신은 때로 이곳이 상하이 같지 않다고 느낄것이다.

<온더 워터프론트: 상하이에서> 中

■김 올해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흥미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왔다고 들었다.

■로우 아주 재미있는 프로젝트였다. 여러 감독들이 대략 15분에서 20분 정도 되는 분량으로, 클래식 영화 속의 도시라든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어찌됐든 항구도시에 대한 영상물을 찍는 거였다. 너무 자유롭게 찍으라고 하니 오히려 어려웠다는 사람도 많았다. <온더 워터프론트: 상하이에서>라는 15분짜리 내 작품은 다행히 상하이가 항구도시라 더이상 망설일 이유 없이 찍어나갔다

■김 제작비는 로테르담에서 전액지원했나?

■로우 5천유로(590만원) 정도. 그저 교통ㆍ숙식비, 말하자면 노잣돈 정도다. 5분 이상이라는 조건만 충족시키면 되기 때문에, 그 돈으로 찍는 사람도 있고 사비 털어 1시간짜리를 만든 감독도 있더라.

■김 PPP프로젝트이자 차기작인 <여름궁전>(Summer Palace)은 언제쯤 볼 수 있나?

■로우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있는 단계다. 올해 안에 촬영을 끝내고 싶다. 6월쯤에 여름분량을 찍고 추워지면 겨울분량 찍고, 후반작업까지 하면 연말이 되지 않을까.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타이의 논지 니미부트르가, 인도네시아의 가린 누그로호가 자국영화의 미학적 발전과 그 나라 영화시장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지금 로우예가 급변하는 중국에서 그 역할을 해줄 거라는 믿음을 내비쳤다. 로우예는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며 다소 쑥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름궁전>을 들고 내년 부산영화제를 찾아달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 그가 지어보이던 확신에 찬 미소는 앞선 물음의 대답을 대신하는 듯했다.

대담정리 백은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