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이라는 고유명사는 종종 ‘장진스럽다’는 형용사의 용례를 통해서 설명돼왔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장진 감독은 ‘장진스러움’에 머물지 않고 최근 몇년간 멜로(<아는 여자>), 스릴러(<박수칠 때 떠나라>), 액션(<거룩한 계보>)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영화적 외연을 넓혀왔다. 신작 <아들>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정통 드라마다. 강도살인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 강식(차승원)은 1박2일 동안 가족을 방문할 수 있는 귀휴 대상자로 선발되어 고향 집에 간다. 그러나 어머니(김지영)는 치매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들 준석(류덕환)은 15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가 낯설어 겉돈다. 얼어붙은 아들의 마음을 어떻게 녹일 수 있을까.
확실히 <아들>은 장진 감독이 새 영역에 스스로를 밀어넣은 작품이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장진 감독이 새 모습을 보였는지, 이전의 ‘장진스러운’ 특성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따지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로지 이 작품이 창작품으로서 훌륭한지 아닌지, 즐길 만한지 그렇지 않은지가 중요할 뿐이다. 거의 원초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장진적인 것’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신작을 평가할 때, 그 작품 고유의 가치를 제대로 보아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들>은 이야기를 축조함에 있어서 두 가지 강력한 도구를 사용한다. 하나는 내레이션이고 하나는 반전(反轉)이다. 그런데 문제는 연장함에서 고르고 고른 결과가 패착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잘못된 도구를 골랐다. 그리고 생각만큼 활용도가 넓지 않은 그 도구를 두드리고 후비고 때리고 문지르고 갈무리하는 그 모든 작업에 일률적으로 사용했다.
<아들>은 (최소한 표면적으로) 적막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채택하고도 스스로 정적을 견디지 못해서 내내 ‘수다’를 늘어놓는 이상한 영화다. 어색하고 불편해서 대화를 제대로 나눌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 독백을 내레이션에 실어 자신들의 심리를 끊임없이 관객에게 ‘현장중계’하는 과정에 반복해 접하다보면, 흡사 극장에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러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다.
이 영화는 “슬픕니다. 아픕니다. 아들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내 눈이 싫습니다”라는 식으로 감정을 토해내는 직접적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이 느껴야 할 지점을 일일이 ‘지시’한다. 잠시 침묵이라도 흐를라 치면 “아들의 듬성듬성한 젓가락질이 나를 자꾸 미안하게 만듭니다” 같은 독백이 끼어들어 그 침묵의 의미를 기어이 찾아내 손에 쥐어준다. 아버지와 아들의 내레이션만으로도 모자라서 후반에서는 둘을 지켜보는 사람까지 “사랑한다 보고 싶다 이런 이야긴 입 밖에 못 꺼내는 강식씨는 참 바보 같습니다”라고 보이스 오버로 확인 도장을 찍는다. 수시로 조바심을 드러내는 그 많은 내레이션들은 심리묘사가 들어설 자리를 대신 차지한 채 감성을 감상으로, 디테일을 관념으로, 상징을 기호로, 기계적 번안을 한다.
코미디 황제의 보좌에서 스스로 걸어내려와 <국경의 남쪽>에 이어 진지한 휴먼드라마에 재도전한 차승원에겐 좋은 얼굴이 있다. 그런데 그 좋은 얼굴이 착해지려 할 때, 차승원의 목소리와 표정은 아마도 그가 마음속에 떠올렸을 법한 일정한 패턴 속으로 딱딱하게 고착화되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휴먼드라마라고 반전의 모티브를 도입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와 질적으로 다른 도약을 통해 감동을 증폭시키거나 이야기의 풍성함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반전이라면, 영화 자체에 탄력과 입체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제시되는 이 영화의 반전은 긴장이 풀려버린 극에 강제로 전기충격을 가해서라도 박동을 만들어내려는 인위적인 극적 장치로 보인다. 잘못 사용된 반전은 애써 쌓아올린 구조와 극 전체의 정서를 일거에 뒤틀어버리는 블랙홀이 된다. 장진 감독은 카메라가 아니라 시나리오로 <아들>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