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환을 보면서 일본을 생각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한국은 이토록 일본을 반복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언제나 출발이 늦었다. 1980년대 일본 마라톤이 세계를 제패하기 시작하자 90년대 한국은 올림픽 금메달을 따버렸다. 알다시피, 92년 바르셀로나의 황영조. 일본 여자 피겨스케이트가 90년대부터 세계 정상을 제패하자 2000년대 한국의 김연아가 떠버렸다. 기타지마 고스케가 2002 아테네올림픽 평영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박태환은 2006 베이징올림픽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딸 ‘것이다’. 한국은 언제나 출발이 늦었지만, 어느새 일본의 등 뒤에 따라와 있었다. 때때로 “스미마셍” 한마디 인사도 없이 추월해버렸다. 마라톤, 체조, 피겨, 수영. ‘뽀다구’나기 때문인지 일본이 정말로 잘하고 싶어하는 종목을 한국은 어느새 잘해버렸다. 오랫동안 세계 정상이었던 일본 마라톤이 그토록 올림픽 금메달을 원했지만, 정작 금메달을 딴 것은 황영조의 한국이었다. 일본수영협회가 동양인 체형에 잘 맞는 평영을 열심히 ‘파고 또 파서’ 금메달을 ‘만들자’, 한국인 박태환은 동양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자유형 금메달을 따버렸다. “Impossible is Nothing”, 아디다스는 대한체육협회에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
박태환을 보면서 개천에서 용나던 시절을 떠올렸다. 강남 출신들이 서울대를 점령하고야 알았지만, 개천에서 용이 나던 때는 그래도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던가. 21세기 한반도에서 개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그래도 드라마는 계속된다. 다만 무대가 한반도를 넘어서 세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주인공은 박태환, 김연아 같은 ‘돌연변이’들이다. 그간의 세계대회 성적으로 따지면, 개천도 못 되는 한국의 수영장에서 박태환 같은 용이 나왔다. 개천을 얼려서라도 빙상장으로 써야 하는 한국에서 김연아가 배출됐다. 이렇게 그들의 드라마는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된 ‘개천에서 용 났다’ 시리즈의 21세기판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 ‘글로벌’한 ‘드림’을! ‘드림스 컴 트루!’의 환상을 증거한다. 이렇게 오늘날 한국은 어제의 경제 기적을 오늘의 스포츠 기적으로 복습한다. 여기에 민족주의 드라마 요소까지 가세하니 금상첨화. 일본이 아무리 수십년 계획을 세워서 치밀하게 노력해도, 한국은 어느새 쫓아와 일본과 어깨를 겨룬다. 그것도 깜짝 영웅의 등장이라는 아주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이렇게 스포츠를 진정한 스포츠로 만드는 역전극이 한국에선 심심찮게 벌어진다. 물론 여기엔 ‘싹수’가 보이는 사람, ‘되는 놈’ 에게 몰아주는 개발논리가 뒤따른다.
영웅극에는 기승전결이 생략된다. 박태환 이전에 한국 수영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최고성적은 ‘고작’ 7위였다. 한규철 선수가 98년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에 최초로 올라 세운 기록이다. 손기정, 남승룡 옹 이후에, 황영조 이전에 한국 마라톤은 올림픽 메달을 언감생심 꿈꾸지도 못했다. 하지만 1등주의 대한민국에 동메달, 은메달 차분히 따면서 올라갈 여유가 없었다. 땄다 하면 금메달, 그것이 ‘다이내믹 코리아’의 방식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인구가 뒷받침하는 중국과 경제력이 밀어주는 일본 사이에서 한국 스포츠가 생존해온 방식이다. 멀리는 배구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최초의 구기종목 올림픽 메달은 여자배구에서 나왔다. 여자배구는 일본이 64년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한국은 76년 몬트리올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아마도 체격이 비슷한 일본의 기술은 한국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90년대 동양인 최초로 세계피겨선수권대회를 우승한 이토 미도리의 존재는 아사다 마오의 등장뿐 아니라 김연아의 출현도 자극했을 것이다. 그것은 불교가 중국과 한국을 거쳐서 일본에 전파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사실이요 흐름이다. 오히려 가끔씩 ‘사고’를 쳐서 존재를 증명하는 한국의 방식이 신기할 뿐이다.
추신. 아니, 왜 저렇게 흥분하시나. 인터넷으로 일본 방송에 중계된 박태환 경기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박태환이 출전한 자유형 400m 경기의 시작부터 아나운서는 “박태환, 박태환” 하더니 마지막 역전극이 벌어진 50m에서는 “한고쿠노 바끄태환!”을 적어도 10번은 외쳤다.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내자 해설자는 “쓰~바라시”의 “쓰”를 한참 끄는 발음으로 “대단한” 박태환에 흥분했다. 심지어 흥분한 나머지 “니폰노 바끄태…”라고 국적을 바꾸는 실수도 했다(1초간 정말로 썰렁했다). 그전에 혹시나 저들은 김연아를 자기네 선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의심도 품었다. 김연아 선수는 일본에서 열린 세계대회를 마치고 라이벌 일본 선수들과 함께 일본의 토크쇼에 출연했다.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를 나란히 앉혀놓은 모습을 보면서 ‘혹시 저들은 1, 2, 3위를 자기네들이 휩쓸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서 혼자서 웃었다. 김연아가 쇼트프로그램에서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펼치자 기립박수를 보냈던 일본 관중이 겹쳐서 더 그랬다. ‘저것은 한국을 정말로 가까운 이웃으로 느껴서 살갑게 응원하는 것 같기道 하고, 아니면 잠자던 대동아 공영권의 미망을 한류가 은근히 자극한 것 같기道 하고…’, 박태환과 김연아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포스트 한류’의 영향을 읽을 수 있을까?